사회

동물권 운동, 비거니즘 그리고 종 차별 반대

[이 글은 프랑스 혁명적 노동자조직 LO가 자신들의 축제에서 발표한 정치포럼 발제문으로 이 조직의 기관지 2019년 7-8월호에 실려 있다. 프랑스의 구체적 사례를 다룬 부분 등을 약간 빼고 90% 정도 번역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 ] 안에 옮긴이 주나 해설을 덧붙였다. 프랑스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도 동물권 운동, 비거니즘 등은 최근 몇 년간 소부르주아층과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 글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한 번이라도 고민해보았거나 고민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해방물결

“동물권 운동(animal cause)”은 프랑스에서 10년 정도 이슈가 돼 왔다. 특히 소부르주아들과 청년들 사이에서 그랬다. 이번에 5월 하순에 열린 유럽의회 선거에서 동물보호당 등과 함께 녹색당 등이 약진했다. 2016년에 정치무대에 등장한 동물보호당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언론이 철저히 무시했다.

동물권 운동이 점점 더 고려되고 있는 건, 무엇보다도 인간의 소비를 위해 동물들을 사육하고 운송하고 도살하는 수치스러운 과정에 대한 혐오감과 분노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분노에는 공감할 수 있다. 동물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또한 동물행동에 대한 최신의 과학적 연구 성과 덕분에도 키워지고 있다. 이런 연구 성과들은 동물들이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실제로 발달시킨다. 이런 연구 성과 덕분에 우리는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고, 그들 중 가장 고등한 동물은 자의식을 가질 수 있으며,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의식도 가질 수 있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인간 종의 생물학적 진화와 사회적 진화에 따라 결정된다. 이 관계는 인류 역사 과정 내내 변해 왔다. … 인간과 동물의 경계도 변해 왔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원주민과 호주 사람들의 토템[원주민 사회에서 신성시되는 상징물] 동물들은 씨족의 조상이라고 간주된 신화적 동물들이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 전체 역사

인간의 역사수천 년 동안, 인간 종은 식물을 채집하고, 큰 동물들을 사냥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 고기를 먹고 살아남을 수 있었고, 다른 많은 구성요소(털, 뼈, 신경 등)를 일상생활의 모든 행위에 사용했던 동물들에 대해 사람들이 일종의 존경심을 가졌던 것 같다. 최근까지 이런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단서가 나온다.

이제는 칼라하리 사막으로 밀려난 남아공 산(San) 부족의 수렵채집인들은 [코끼리·사자 같은] 큰 짐승을 사냥할 때, 오직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냥하는 것이라고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사냥감들에게 말을 한다.

신석기혁명을 통해 대부분의 인간 공동체에 농경과 목축이 확산돼, 몇몇 동물을 사육하게 되자,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밭을 갈고, 수레를 끄는 데 동물을 이용하거나, 동물의 털, 가죽, 달걀과 우유 등을 얻고, 좀 더 때때로는 고기도 얻게 된다.

유럽에서는 18세기까지, 가장 진보적인 지식인조차 인간만이 정신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은 다른 동물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18세기의 첫 유물론자들은 정신은 물질에서[물질의 진화를 통해] 나온다는 점을 설명해, 인간과 다른 생명체 사이의 통일성을 재정립했다. 그런 다음 19세기 중반에 다윈은 자연선택[적자생존]을 통한 종들의 진화를 설명해, 생명계에 대한 이런 통일적 관점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했고, 인간도 동물 왕국의 일부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줬다. 19세기에 최초의 동물보호법이 등장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제 이윤 법칙에 종속된 동물들

19세기 중반부터,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사회와 그 환경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이윤의 압력에 종속돼 왔다. 미국 남북전쟁[1849–1865]과 평원 인디언 학살 이후, 미국 자본가들은 육류 생산 부문을 통제하기로 했다. 원주민들을 없앤 이 거대한 나라에서, 식량을 얻기 위해 짐승들을 방목하고, 곡물을 경작하는 데 막대한 공간을 할애했다. 그래서 육류 생산 부문은 정말로 큰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전도유망한 분야였다.

기술혁신, 특히 철도와 냉동 화물 기차는 중앙집중적이고, 산업적인 규모의 육류 생산을 가능케 했다. 똑같은 생산방식이 나중에 유럽에도 도입됐다(프랑스에는 2차 대전 이후에 가서야 도입됐다). 나머지 세계는 제국주의 국가들에 수립된 육류 산업의 필요에 따라 농업 생산을 조직하도록 강요받아 왔다. 현지의 식량생산은 주요 수출용 작물 생산에, 특히 동물의 사료로 쓸 작물 생산에 길을 내줬다.

정글

처음부터, 육류산업 자본가들은 격렬한 계급투쟁을 벌였다. 업튼 싱클레어는 1906년에 쓴 소설 <정글>에서 이런 모습을 소름 끼치게 묘사했다. [<정글>은 한국에도 번역돼 있다.] 자본가들은 자기 도축장[육류 가공 공장]의 노동자들이 끔찍한 라인작업을 하도록 강요했다. 나중에 이 라인작업을 자동차 자본가들이 모방했다. [포드 자동차 회사의 설립자인] 헨리 포드는 이렇게 산업화된 도축 공장 중 한 곳에 방문했다가 영감을 얻어서 자기 자동차공장의 기계화 시스템[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포드 공장의 조립라인]을 발전시켰다고 나중에 회상했다.

육류산업 자본가들은 이제 자신들의 조수로 전락해 버린 농민들로부터 농업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아 버렸다. 이것이 농부들과 그 가축의 관계를 크게 바꿔버렸다는 점을 주목하라. 가축은 자본이 돼 버렸는데, 오늘날 프랑스에서 젖소 한 마리당 1,400유로[약 180만 원], 70마리의 소는 약 10만 유로[약 1억 3천만 원]를 대표한다. 금융회사들은 개인들에게 약 4-5%의 수익률을 약속하며, 소에 투자하라고 권한다.

육류산업에서 동물들이 겪는 고통

이윤경쟁 때문에 인간 노동이 ‘탈인간화’하듯[노동소외], 육류산업에 원료로 공급되는 소들도 ‘탈동물화’의 고통을 겪고 있다. 동물의 이익을 방어하는 것, 특히 도축장에 끌려가는 동물들의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자고 하는 것에 대해 누가 그걸 원치 않겠는가? 이런 근거에서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존중한다.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의 동물과학 교수이며, 자폐인이자 여성과학자인 템플 그랜딘이 그런 경우다. 그녀는 고기를 소비하기 위해 동물을 기르고, 사육하는 것은 문제삼지 않는다. 하지만 동물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고, 고통 없는 죽음을 보장하기 위해 싸운다. 1970년대에 그녀는 죽이기 전에 소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도록 도축시설의 규모와 형태를 개발했다. 이런 도축시설은 커브길을 따라가는 소의 자연스런 경향을 존중하고, 높은 벽이 있어서 주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보이지 않는 통로를 통과하게 하며, 바닥은 미끄러져서 넘어지지 않게 하는 재질로 만들었다. 이런 형태의 시설은 그 유효성이 입증돼, 이제는 전 세계의 상당수 도축장에서 이용되고 있다[미국에서는 1/3 정도 되는 듯함].

템플 그랜딘 박사는 도축장으로 가는 소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연이 참혹하다는 점을 안다. 나는 정말로 한 떼의 사자들에게 뜯겨 먹히는 방식으로 죽고 싶지 않다. 인간적으로 이뤄질 수만 있다면, 나는 차라리 도축장에서 죽고 싶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암소를 사육한다. 그렇다면 암소에 대해 최소한이라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 나는 [머리를 맞아] 기절하기 전의 소를 만져 보았다. 몇 초 뒤에 소는 [머리를 맞고 쓰러져] 한 조각의 고기처럼 돼 버렸다. 하지만 잠깐 동안 그 소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런 다음 조용해졌고 죽게 됐다.”

하지만 농식품 산업 자본가들은 인간[노동자]에 대해 고려하지 않듯, 동물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아 왔고, 앞으로도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근거에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당하고, 존경할 만하지만 허사로 끝나는 투쟁을 하고 있다. 사회 전체가 썩어가면서, 더 빠르게 이윤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농축산업 부문의 자본가들이 동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자기 이윤을 축소하는 걸 동의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정부들이 수의과 서비스들을 포함해 모든 공공서비스를 공격하면서 공공부문 예산을 삭감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이런 동물들이 사육되고 도축당하는 조건에 대해 정부들이 더 잘 감독할 방법을 강구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진짜 지배자인 자본가들

동물권 운동에 근거해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 가운데는, 동물학대의 책임과 관련해 도축장 자본가들과 도축장 노동자들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아, 실질적 책임자인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경제를 규탄하지 않는 매우 반동적인 사상을 전파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도축장의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L214 협회의 영상은 동물을 학대하는 노동자들을 다루는데, 이런 동물 학대를 낳은 형편없는 노동조건에 대해 그 노동자들이 설명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

L214 협회의 목적은 “소비자들이 책임 있는 소비 태도를 지니게 하는 것”에 있다. 즉 “최선은 동물로부터 온 모든 생산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며, 적어도 그런 제품의 소비를 줄이고, 집약적 가축농장에서 온 제품들을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소비할 자유가 분명히 있다. 동물에서 온 모든 제품을 먹거나 사용하지 않는, 그리고 그렇게 해서 자신이 동물을 고통스럽게 하는 데 동참하는 공범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는 비건[완전 채식주의자]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적 소비 태도를 지니는 것과 그런 관점에서 싸우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어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자본가들에게 정확히 책임을 묻지 않은 채, 모든 사람이 소비자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며 문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주 퇴행적인 것이다.

종 차별 반대론자들에 따르면 모두가 유죄

많은 비건[완전 채식주의자]은 자신들의 소비 선택을 ‘종 차별 반대(anti-specism)’론에 입각해서 정당화한다. ‘종 차별 반대’라는 말은 1970년대에 등장했는데, ‘인종차별 반대’(anti-racism)라는 말을 본떠 나왔다. 이 말의 옹호자들은 자신들이 ‘종 차별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반대한다. 마치 인종차별론에서 몇몇 인종이 있고, 백인종이 다른 인종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듯, 동물 종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있고, 인간이 이 서열에서 맨 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종 차별주의’다.

종 차별 반대론자들은 종 차별주의가 동물 착취, 동물 학대 등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점에서는 휴머니즘보다 더 나아가는 정신적 변화를 호소한다. 그들은 인간이든 다른 동물이든 감정이 있는 어떤 개체에 대해서도 똑같은 도덕적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종 차별 반대론자들은 고기 소비자, 농축산업 노동자, 정육점 주인, 육류 공장 자본가, 동물실험을 하는 화학실험실 소유자, 심지어 투우사 또는 사냥꾼이 모두 똑같이 유죄이며, 동물들이 결국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자신들의 종 차별주의적 정신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종 차별 반대 사상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반동적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인간-동물 관계의 진화를 부정하는 데로 귀결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투쟁을 부정하는 데로 귀결된다.

이런 사상들이 현실에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사상은 점점 더 첨예해지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라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불의와 정신적 혼란이 소부르주아층을 비롯해 점점 더 많은 층을 강타한다. 그들은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궁지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다고 느낀다. 사회체제가 그들을 망가뜨리고 있지만, 그들은 사회 질서에 의문을 품을 수 없다. 노동자운동이 조직돼 있지 않은 시기에는, 그래서 무기력해 보이고, 사회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전망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기에는 필연적으로, 계급적 기초가 없는 이런 도전은 개인주의적 개념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사회 해방과 착취의 종식은 달성할 수 없는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꼬뮤니즘 사상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어느 정도 인기를 끌고 있는 저항운동은 작은 문제들에만 도전한다. 그들의 도덕적 태도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 자본주의 심장부에 있으며 자본가들에겐 부를 보장하는 착취, 오직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공격할 때만 제대로 맞설 수 있는 착취에 도전하는 데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비건 패션, 새로운 이윤의 원천

주요국 채식주의자 규모

자본주의는 새로운 비건 패션에 쉽게 적응한다. 심지어는 이윤을 위해 이런 흐름에 편승하기도 한다. 고기 소비를 줄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을 겨냥하는, 대체 식품 생산 시장은 ‘니쉬 마켓’[틈새 시장]이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 해리스 여론조사서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2016년에 소비자 4%가 자신이 비건[완전 채식주의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시장은 이미 2018년에 프랑스에서는 3억 8천만 유로[약 4,500억 원]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은 2018년에 비해 24%나 올랐고, 2021년에는 60%나 오를 것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것은 이 새로운 시장에 투자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줄기세포를 통한 인조육[인조고기] 개발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한 빌 게이츠는 그 점을 이해하고 있다. 농식품 산업의 자본가들도 수년 동안 이 분야에 개입해 오고 있다. 이제 대규모 유통업체들도 비건 제품들을 공급하고 있다. 가령, [프랑스 최대 식품 유통업체] 까르푸는 2015년에 채식 전문 자체 브랜드 까르푸 베지(Veggie)를 출시했다. 육류 제조업체들은 소시지 스테이크나 야채 스테이크를 제공할 수 있도록 자기 생산라인을 조정하고 있다. … 또 다른 거대 식품회사인 네슬레도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 이런 비건 시장에 거대 자본가들이 뛰어들면서, 그동안 식품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기업들이 아웃사이더 위치로 가차없이 밀려났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자본주의다. 돈이 되는 시장에선,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다.

이제 비건 시장은 수익성 있는 새로운 산업이 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비거니즘[완전 채식주의]을 ‘소화’하고 있다. 저항운동으로 등장했던 이전의 많은 양식을 소화해 왔던 것처럼 말이다. 왜냐면 자본주의는 노동자혁명을 제외한다면 모든 걸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문제삼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돈벌이] 사업을 할 방법은 항상 있다.

자연보호에 관심을 갖는 맑스주의자들

인류 역사를 통해, 인간은 자연에 대한 영향력을 점점 더 확대해 왔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인간에게 책임을 부여한다. 우리 맑스주의자들은 우리 주변의 생태계에 대한 인류의 책임의식을 깊이 체화하고 있다. 맑스가 당대에 말했듯이, 우리 인간은 “생태계의 좋은 아버지로서, 잘 개선해서 미래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 지구[즉 자연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동물들]를 돌보아야만 하는 유일한 사용자”다.

하지만 이런 필요성은[미래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 자연을 보호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조직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사적 소유와 경쟁에 기초하고 있기에, 인류의 식량문제나 지구 자원의 관리 문제 같은 인류와 그 환경의 근본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단초조차 제시할 수 없다.

해결책은 착취와 이윤 추구가 없는 사회,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생산하고, 자연과 동물을 존중하면서 생산하는 사회에서만 찾을 수 있다. 꼬뮤니즘 사회의 인간들이 어떻게 식량생산을 조직할 것인가? 그들이 고기를 계속 생산하고 먹을 것인가? 그들이 식물 생산에 만족할 것인가,

심지어 그들이 농업과 가축 사육을 완전히 중단하고, 인조 생산물만 먹기로 결정할 것인가? 꼬뮤니즘 사회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미래는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며, 미래가 어떨지를 [상세하게] 상상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점뿐이다.

혁명적 강령과 동물권 운동

“맑스주의자들과 동물해방주의자들은 혁명을 위해 그리고 진짜로 문명화하는 프로젝트, 즉 인간과 동물과 자연의 해방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위 인용문은 [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NPA)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인용문은 한편으로 종 차별 반대론자들에게 그들은 맑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설득하려고 하며,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종 차별에 반대해야 한다고 설명하려 한다.

2001년에 다니엘 뱅사이드가 만들었고, 지금은 NPA에 들어가 있는 <시류를 거슬러>라는 잡지도 종 차별 반대 언어를 채용한다. “동물문제: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열려 있는 토론 주제”. 이 글은 종 차별 반대를 선택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남성 중심적 방식으로 작성된’ 맑스주의의 개념, 특히 맑스주의 노동 개념을 비판하는 것과 맥이 닿는다고 썼다. 저자에 따르면, 맑스의 개념은 극도로 환원주의적이어서[남성 중심의 노동만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듯한 방식으로 ‘남성 중심 환원주의적’이어서], 모든 형태의 노동을 고려하지 않는다. 가령, 여성의 가사노동이나 동물의 일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비판은 더 이상 사회계급, 이윤을 생산하는 노동[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임금노동자의 노동]이란 측면에서 사고하지 않고, 대신 노동자, 여성, 동물, 또 다른 피억압자 같은 개인적 차원에서 사고한다. 자본가계급의 착취는 여러 억압 중 하나가 될 뿐이다.

혁명강령을 이렇게 바꾸려고 하는 것은 단지 소부르주아층에서 유행하는 최신 사상들에 양보하면, 그 소부르주아층에서 혁명적 사상에 귀를 기울이는 더 나은 청중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상황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이런 꽁무니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년 동안, 혁명적 강령에는 다양한 억압적 범주들에 대한 여러 운동이 섞여들었다.

페미니즘, 반(反)인종차별주의, 이주민 옹호, LGBT 권리 옹호[LGBT란 레즈비언(lesbian)과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의 앞 글자를 딴 것으로 성적소수자를 의미한다]. 이런 억압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따라서 이런 억압에 맞선 운동은 정당하다. 하지만 이런 운동들로 자본주의 체제를 철폐하기 위한 투쟁을 대체해 버리는 것은 혁명적 꼬뮤니즘 사상을 포기하는 것이며, 더 이상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믿지 않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조건 짓는 사회의 근본문제는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으로부터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경제는 완전히 침체 상태에 있다. 노동조건은 어디에서나 나빠지고 있고, 착취는 증가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인간과 자연에 대한 고려는 더 줄어들고 있다. 누가 자본주의를 철폐할 것인가? 노동자계급이다. 노동자계급만이 그럴 수 있다. 어떤 도구를 통해 노동자계급은 자기 투쟁의 목표에 이를 수 있는가? 혁명적 꼬뮤니즘 노동자당이다. 혁명적 꼬뮤니즘 강령, 맑스주의 강령, 트로츠키주의 강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모든 건 교란[혼란]일 뿐이다.

우리 LO[프랑스 혁명적 노동자조직]의 유일한 존재 목적은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사회적 힘과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힘을 쏟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유일한 탈출구는 개인적 행동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과 노동자들을 계급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분야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을 향상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

우리는 지금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사회 전체를 재앙으로 끌고 들어가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도살당할 운명에 처한 동물들의 끔찍한 고통은 인류와 전 세계의 이익에 대한 많은 공격, 많은 잔학행위 중 하나일 뿐이다.

노동자운동은 지금 매우 약하다. 자본주의가 밀어넣은 파국 상태에서 노동자계급 전체가 그리고 마침내는 사회 전체가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혁명적 꼬뮤니즘 당을 재건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노동자들이 고개를 쳐들고 싸울 능력이 있다는 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상황에서 운동을 재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우리는 종 차별 반대론자라고 우리를 부르는 것에 반대한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노동자계급 종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노동자들의 의식과 노동자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우리의 정치적 선택과 우리 활동의 초점을 둔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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