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100년 전 이집트 노동자계급의 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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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판 3.1운동

1차 대전이 터지자, 영국은 이집트에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고 자신들의 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했다. 그 대가로 전쟁이 끝나면 이집트에 민족자결권을 줄 수도 있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어도 영국은 자결권을 보장하지 않았고, 오히려 1919년 3월 8일 민족주의 정당(와프트당)의 지도자들을 체포해 몰타 섬으로 추방해 버렸다. 이 사건으로 전국이 격렬하게 끓어올랐다. 수주일 동안 날마다 이집트의 모든 도시에서 격한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이집트판 3.1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3,4월의 가두투쟁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노동자들이 자기 요구도 내걸고 파업물결을 일으켰다. 카이로에서 전차 노동자들이 파업하자 모든 운수노동자가 그 뒤를 따랐다. 일주일 안에 이집트 전역의 철도노동자들이 파업했다. 뒤이어 인쇄, 전기, 군수무기, 항만, 체신 등으로 파업이 확산됐다.
기업들이 파업을 깨기 위해 군대의 발포를 포함해 온갖 책략을 동원하자, 파업노동자들은 시위대에 도움을 구하는 한편, 스스로를 방어하고 파업의 힘을 유지할 수단을 찾아야 했다. 그 결과 특히 철도 등에서 수많은 태업이 벌어졌다. 하지만 민족주의 정당 지도부는 군인들의 총탄을 맞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법을 지키자’고만 했다. 식민지 조선의 민족주의 세력들과 완전히 판박이 아닌가?
영국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저항운동이 지속되자 영국정부가 결국 항복했다. 4월 8일에 와프트당 지도부를 석방했다. 그 결과 가두시위는 가라앉았지만, 파업 물결은 꺾이지 않았다. 4월 15일에는 공무원들이 파업에 합류했다. 3,4월 파업들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예를 들어 카이로 전차노동자들은 8시간 15분 노동제, 병가비로 통상임금의 25% 지급, 상당한 수준의 임금인상 등을 쟁취했다.

“노동조합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다!”

1919년 5~6월에는 또 다시 4주간의 대중파업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수에즈 운하의 산업단지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운하 운영 노동자만이 아니라 공장노동자, 정비노동자, 항만시설관리 노동자 등도 파업에 참여했다. 이 파업으로 기술, 기업, 업종, 국적을 뛰어넘는 수에즈 국제노조가 탄생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도 이 노조에서 적극 활동했다.
8월에 새로운 폭발이 다시 크게 일어났다. 다시 카이로 전차노동자들이 떨쳐나섰고, 알렉산드리아 등의 전차노동자들이 뒤따랐다. 그 후 파업은 모든 산업으로 들불처럼 확산됐고, 심지어 많은 소사업장도 덮쳤다. 무엇보다도 파업에 처음 참여한 이들 모두가 노조의 권리를 전면에 내세워, 곳곳에서 새로운 노조들이 탄생했다. 총파업이 벌어진 11일 동안 이집트 일간 자본가언론은 “노동조합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다!”며 당혹해 했다.
한 달 뒤 모든 파업이 끝났는데, 파업물결은 노동자들에게 승리감과 자신감을 주었고 다음 시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많은 굳건한 노조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러시아 볼셰비키처럼 전투태세를 갖춘 혁명정당은커녕, 어떤 노동자당도 1919년의 이집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집트 노동자계급은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상황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민족주의자들과 이집트 자본가들은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활력을 희생시키며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이집트 역사에서 반복되는데,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명환

참고 : <이집트, 이제 노동자계급의 깃발을 들어야 한다>
영국 노동자투쟁 그룹, 2011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