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일제하 노동운동의 역사와 교훈


{이 글은 <3.1운동 100주년, 원산총파업 90주년 기념토론 – 일제하 노동운동의 역사와 교훈> 발제문을 조금 수정·보완한 글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래를 누가 지배할 것인가라는 사활적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를 지배하기 위한 ‘기억의 전쟁’은 첨예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는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통해 ‘친일 전통 = 자유한국당’, ‘항일 전통 = 민주당’의 이미지를 퍼뜨려 지지기반을 강화하고, 이를 발판으로 장기집권을 준비하며, 노동자들을 더 강하게 공격하려 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노동자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3.1운동의 배경 191710월혁명

자본가계급이나 중간계급 지식인들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 선언이 3.1운동의 배경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윌슨의 민족자결 선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배경은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이다. 10월혁명으로 등장한 러시아 노동자권력은 민족자결권을 선포하고, 모든 러시아 식민지의 자결권을 즉시 보장했다. 이것은 전 세계 피억압민족을 크게 고무했다. 그래서 선진국의 노동자혁명과 식민지의 민족해방혁명 투쟁이 결합해 세계를 뒤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활짝 열렸다.

여기에 두려움을 느낀 윌슨은 1918년 1월 민족자결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것은 독일 같은 패전국의 식민지에 대해서만 자결권을 보장한다는 철저히 기만적인 선언이었다.

“일본은 1차 대전에서는 미국과 같은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은 애초에 윌슨 선언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윌슨의 민족선언은 소련의 민족자결 원칙에 쏠린 약소국의 민심을 흩어놓기 위한 교란작전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조선인들은 윌슨의 선언에 크게 고무됐다. 거족적인 항일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분위기는 점차 거세졌다.”(<박헌영 평전>, 안재성, 54쪽)

1917년 10월혁명과 그 뒤를 이은 세계혁명의 물결이 3.1운동의 국제적 배경이라면, 국내적 배경도 따로 있다. 1910년에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마저 박탈하며 폭압적으로 통치했다.

1910~1918년 사이에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으로 토지를 대량 수탈해 전체 농민의 80%를 소작농이나 자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보통 5~7할, 심지어 9할에 이르는 소작료를 지주에게 바쳐야 해 농민의 고통은 매우 컸다. 일제는 1910년에 회사령을 실시해 민족 자본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대신, 일본 자본의 조선 진출을 장려했다. 일본 자본이 들어오면서 5인 이상 민간공장의 경우 1911년에는 251개에 소속된 노동자는 14,575명이었으나 1919년에는 1,900개, 48,705명으로 늘었다. 여기에 광산, 철도, 운수 등의 분야까지 합치면 1919년에 조선에 살고 있던 노동자는 14만 명을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의 대우는 형편없었다. 그래서 민족적 억압과 노동자·농민에 대한 경제적 착취 등이 맞물려 쌓이고 쌓였던 불만은 폭발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의를 위해 떨쳐 일어선 청년들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은 민족부르주아지와 중소 지주계급을 대표하는 나약한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일제보다 대중투쟁을 더 두려워했다. 고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십 만 인파가 서울에 집결하고, 일본이 고종을 죽였다는 소문 때문에 반일감정이 고조되자 민족대표 33인은 겁을 먹고 동요했다. 예정대로 탑골공원에서 선언문을 낭독할 경우 군중과 일경의 충돌로 대규모 폭력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고 우려해 집회 바로 전날 마지막 모임에서 옥외집회를 포기했다. 대신 탑골공원 근처의 고급 한식당인 태화관에서 자신들끼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뒤 일제 경찰에 자수해 버렸다. 결국, 이들의 다수는 머지않아 일제의 회유에 포섭돼 친일파로 변절했다.

하지만 노동자 민중은 대담하게 싸웠다. 3월 1일 정오에 수천 명의 군중이 탑골공원에 모여들었다. 이 군중은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자발적으로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전국 곳곳에서 처음에 선두에 선 건 학생들이었다. 3월 1일부터 매일이다시피 가두시위에 참가하느라 서울 시내 조선인 학교는 거의 휴교상태가 되어버렸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의 조선인 학교들이 3월 내내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3.1운동의 절정은 40여 일간 전국의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휩쓴 만세운동이다. 총 시위건수 1,500건, 참가인원 200만을 기록할 정도로 무서운 기세였다.

참으로 용맹스런 노동자들

노동자도 파업, 시위에 적극 나섰다. 가령, 3월 3일 황해도 겸이포제철소에서는 노동자 200여 명이 반일시위를 벌였고, 3월 7일 경성 동아연초공장에서는 500여 명이 파업했다. 3월 19일 괴산 노동자들이 만세시위를 했으며, 일제가 평화시위를 총칼로 잔인하게 짓밟자 3월 27일 직산 금광노동자 백여 명이 일본헌병 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특히, 나중에 조선공산당 당수가 된 용산기관차 화부 차금봉은 3월 27일 철도노동자 800여 명을 조직해 파업을 벌였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차금봉은 용산 철도공장과 남대문 기관구,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의 철도 노동자들을 규합해 대대적인 시위를 기획했으나 회사에 발각돼 바로 해고당했다. 하지만 차금봉은 이에 굴하지 않고, 3월 22일 아침에 남대문역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하러 온 노동자를 한데 모았다. 지게꾼을 비롯한 잡역부, 철도 노동자, 전차 차장, 출근길에 나선 노동자, 인근 지역 주민들까지 8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차금봉을 따라 ‘조선 독립’을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3월 27일에는 차금봉이 철도노동자 파업을 이끌었다. 차금봉의 동료들인 남대문 기관구 기관사들을 포함해 공작창과 조차부 등 용산역 주변에 일터를 두고 있던 철도 노동자 800명이 서울역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조선독립 노동대회’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당당히 파업을 선언했다.

만세운동의 열기가 전반적으로 주춤해졌던 7월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과감하게 투쟁했다. 8월 18일 경성 전기노동자들의 파업은 경성시내를 암흑천지로 만들고 전차운행을 중단시키는 등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또한 10월 12일에는 경성 동아연초공장 노동자들이 파업해 요구조건을 쟁취했다. 그리고 11월 11일 겸이포제철소 노동자 250여 명은 용광로를 점거하고 파업을 탄압하려는 일본 관헌에 대항했다.

늘어나는 노동자, 성장하는 노동자의식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통치정책으로 통치수법을 바꿔 부분적인 자유를 허용해 주는 한편 본토 자본을 더 적극적으로 유입해 노동자의 숫자가 늘어났다. 이 기간에 공장 숫자는 1921년의 730여 개에서 1930년에는 4배에 이르는 2,900여 개로 늘어났다. 노동자 숫자도 10만에서 100만 정도로 증가했다.

이런 조건에서 1920년대 노동운동은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들 자신이 스스로 만든 노동조합이 생겨나 단위공장조합(경성고무 여직공조합, 경성전자 종업원조합, 목포제유공조합 등)이나 지역별 조합(원산 노동연합회, 마산 노동동우회, 평양노동연합회) 등이 활발히 결성된다.

“1920-21년 사이에 전국 각지에서 결성된 노동자 단체들은 주로 자유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지역 내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들과 심지어 농민들까지 결속한 일종의 합동노조 형태로서 대개 지방 유지들의 후원 아래 친목과 상호부조를 표방한 노사협조적 계몽단체의 성격이었다. 이러한 성격은 1920년 결성된 한국 최초의 전국적 노동자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를 보아도 분명하다.

변호사 등의 주도 아래 몇백 명의 자유노동자들(지게꾼, 인력거꾼)이 모여 ‘생활안정’과 ‘상호부조’를 내걸고 출발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전국 각지의 노동자 단체들이 지부 형식으로 속속 가입하는 바람에 졸지에 17,000여 명의 대조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일단 낮은 수준이나마 단결의 위력을 맛본 노동자들의 의식은 급속히 발전하거든. 요즘은 점차 자본가에 대항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노동조합적 성격으로 변해 가고 있어. 이 과정에서 맑스주의의 영향력이 날로 강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 지금 공제회는 깨지기 직전의 상태야. 날로 발전하는 회원대중의 의식을 중앙본부에 앉아 있는 소부르주아지들이 감당할 수가 있나. 대중은 싸우겠다는데 중앙에선 상호부조나 찾고 있으니… 아마 머잖아 새 조직이 뜰 걸.”(<만화 한국노동운동사1 – 일제하 노동운동>, 형성사, 44쪽)

1921년 부산 부두노동자 파업

1920년대 노동자들의 큰 투쟁은 1921년 9월 부산 부두에서 시작됐다. 조선과 일본의 탄광에서 부산부두로 운송된 석탄을 석탄운반부들이 부산 내 각 회사로 배달했는데, 이 석탄운반부들이 9월 12일 거래 회사들에게 서면으로 임금 4할(40%) 인상을 요구했다가 묵살되자 16일을 기해 1,000여 명 전원이 파업에 돌입했다. 당황한 업주들이 25일까지 확답을 약속했으므로 파업은 일단 하루 만에 풀렸다.

하지만 부두노동자들의 쟁의 합류는 이 투쟁의 성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그것은 석탄 운반부들의 파업과는 의미가 달랐다.

당시 부산항은 한일무역의 관문으로서, 조선 쌀에 크게 의존하는 일본의 입장에서든 일본 공업제품에 목매고 있는 조선의 입장에서든 모두 결정적인 경제요충지였다. 따라서 만일 부산 부두의 화물하역이 마비될 경우, 그것은 조선과 일본의 경제 전체를 뒤흔들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래서 업주들의 대응은 강경했다. “협상이고 뭐고 일체 무시해 버립시다. 노동운동 따위는 발붙일 수 없다는 선례를 남겨야 하오.”

그래서 약속된 9월 25일이 왔어도 업주 측은 반응이 없었다. 마침내 9월 26일 부두노동자 2,000명 전원과 석탄운반부 1,000명 전원이 파업에 돌입했고, 여기에 연관 사업장들의 동정파업이 잇달아 파업인원은 순식간에 5,000명에 이르러 부산 부두는 거짓말처럼 텅 비어버렸다.

경찰은 파업과 동시에 임금인상 요구서를 써준 야학교사 3명과 주동급 노동자 수십 명을 검거하는 등 초기진압에 나섰으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파업대열은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정부와 자본 측은 강경책을 포기하고 구속 노동자 전원을 석방한 후 협상을 시도했다. 그들은 임금을 1할 내지 1할 5푼 인상하고, 구속교사는 파업이 풀린 후 석방하겠다는 안을 제시했다.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은 노동조합 등의 조직적 지도가 없는 조건에서도 수천 명의 노동자가 하나로 뭉쳐 미흡하나마 임금인상을 쟁취해낸 성공적 파업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올바른 사상과 노선에 입각한 조직적 지도가 없었다는 점은 파업의 성과를 줄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무튼 이 파업은 한 도시 내 동일 부문의 전체 노동자가 전체 사용자에 대항해 전개한 최초의 투쟁으로서, 투쟁전술의 새로운 모범을 제시했으며, 단기간이나마 경제계 전체를 뒤흔드는 영향력을 발휘해 노동운동의 위력을 널리 인식시켰다. 또한 이 파업 이후 항구적인 투쟁조직의 필요성이 널리 인식돼 각지에서 노동자 단체들이 조직되는 계기로 작용했다.(<만화 한국노동운동사1 – 일제하 노동운동>, 45-49쪽)

조선노동총동맹

1922년 10월 서울에서 조선노동공제회 내부의 좌익계열이 독립해 조선노동연맹회(약칭 노련)를 건설한다. 노련은 13개 노동자단체의 연합체로 총회원이 2만 명이었다. 맑스주의자들이 지도부를 장악한 노련은, 공제회와는 달리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 개입해 지원 및 지도활동을 담당했다. 특히 메이데이 투쟁을 1923년부터 노동운동의 주요행사로 정착시키는 공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듯 노동대중의 자주적인 조직들이 발전하면서 전체 노동자의 사회정치적 요구를 결집하는 사회정치적 성격의 조직도 함께 모색돼 1924년에는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됐다. 이어 1927년에는 농민조직과 독립해 <조선노동총동맹>이 결성됐다.

당시 노농총동맹의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1. 우리는 노농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우리는 단체의 위력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철저히 자본가 계급과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3. 우리는 노농계급의 현재 생활에 비추어 복리증진과 경제향상을 도모한다.

이렇듯 노동운동 조직의 발전과 함께 노동자들의 투쟁도 발전했다. 당시 가혹한 제국주의 착취 때문에 실질임금이 하락해 가자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맞섰다. 매년 거의 100건에 이르는 파업이 발생했다.

경성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아사파업

근대적 의미의 공장에서 본격적으로 노동쟁의를 선도한 것은 주로 여성노동자들이었다. 초창기 식민지 산업으로 유입된 것이 주로 값싼 여성 인력을 고용하기 위한 신발, 양말, 방직 등 경공업이었기 때문이었다.

1923년 부산의 조선방적공장에서 일부 남성노동자를 포함한 여성노동자 500여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700명의 노동자가 하루 12시간 노동에 30전 내외의 저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는데, 일본인 감독이 조선 여성노동자를 때리자 분노가 폭발해 파업이 벌어졌다. 같은 시기 평양에서는 세 군데 양말공장 노동자들이 임금 인하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이고 서울에서도 양말공장 여성노동자들이 잇달아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양말공장 노동자들이 전면투쟁을 벌이자 고무신공장 여성노동자들도 동맹파업을 일으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23년 7월에 있었던 경성고무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20년대 우리 선배노동자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투쟁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당시 광화문통에 위치한 네 군데의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 150명이 7월 2일 임금인하 반대와 악덕감독 해고를 요구하며 일제히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이후 2개 공장 40명도 동맹파업에 가세했다. 하지만 기업주가 본체만체 하자 7월 7일에는 파업지도부가 ‘아사동맹’을 조직해 끝까지 싸우자는 결의를 제출했다. 여성노동자들은 공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한여름 땡볕 아래 야산기슭 풀밭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한낮에는 무더위로 고생했지만 밤이 되면 밤이슬이 내려 옷을 적시고 새벽에는 추위로 견딜 수가 없었다. 여성노동자들은 서로 웅크려 끌어안은 채 꼬박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런 다음날에도 온종일 굶은 채 땡볕 아래서 파업농성을 이어갔다.

이런 소식은 다른 부문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각 조합에서는 이 여성노동자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지했다. 기업주는 경찰을 동원해 강하게 탄압했으나 결국 완강한 투쟁과 사회여론에 굴복해 교섭이 타결됐다. 이 고무공장 여성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은 죽기를 각오하고 아사동맹 투쟁을 결연하게 펼쳤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노동조합들과 노동단체를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의 지지성원이라는 점에서 20년대 초반 노동운동의 정점을 이뤘다.

서울 고무공장 파업이 끝나고 한 달도 지나지 않은 8월 11일 평양 양말공장 노동자 1,000여 명이 일시에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이 지역별로 동맹파업을 벌이는 일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정미소 노동자들과 인쇄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잇달아 일어났다. 1923년 진남포와 인천에서 정미공들이 임금인하와 관리자 횡포에 반대하며 동맹파업을 벌였고, 1924년 군산 정미공들이 파업하고 정미소를 습격했으며, 1925년 평양, 경성, 부산 등지의 인쇄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벌였다.

공산주의가 빠르게 퍼져나가다

3.1운동을 계기로 공산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4월 초까지 계속된 만세운동으로 7,500여 명이 죽고, 1만6,000여 명이 다치고, 4만7,000여 명이 체포되는 모습을 본 청년들은 보다 강력한 혁명투쟁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민족부르주아지들은 무저항, 비폭력만을 고집해, 자신들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민중이 가슴 깊이 깨닫게 했다. 그래서 이후 민족부르주아지는 민족해방운동에서도 지도적 지위를 상실한다.

한편, 청년들은 자본주의 열강은 식민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러시아 노동자권력만이 사심 없이 식민지 해방운동을 도와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레닌은 국제적인 혁명투쟁으로 제국주의 강대국들을 배후에서 뒤흔들기 위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트로츠키도 이렇게 주장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식민지 노예들이여! 유럽에 노동자계급 독재가 나타나는 시간이 곧 여러분이 해방되는 시간일 것이다.”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젊은 혁명가들은 맑스와 레닌의 혁명사상을 빨아들였다.

“[20세가 되던 1919년 봄에] 졸업장을 받은 박헌영은 취직도 진학도 하지 않은 채 종로구 훈정동에서 동창생 최기룡과 함께 하숙을 하며 공산주의 이론을 독학했다. 조선은행에 취직한 최기룡이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도서관에 가서 공산주의 이론서를 읽다가 저녁이면 종로2가 YMCA 회관에서 영어를 배우고 밤늦게야 돌아왔다. … 휴일에는 하숙생들과 어울려 윷놀이를 하며 놀기도 했으나 거의 모든 시간은 공산주의 이론서적 탐구에 바쳤다.”(<박헌영 평전>, 안재성, 65쪽)

“박헌영은 상해 시절[21-23세]과 감옥살이[23-24세]를 통해 주요한 사회주의 서적들은 대부분 읽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엥겔스의 <가족의 기원>,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의 경제이론>과 베른슈타인의 <사적유물론> 등의 원서들을 통독했으며, 레닌의 저서로는 중국어로 된 <제국주의론>, <국가와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을 읽었다.”(<박헌영 평전>, 안재성, 85쪽)

조선공산당을 건설하다

1925년 4월 17일, 을지로 1가의 중국식당 아서원 연회실에서 연회를 가장해 모인 19명이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4월 18일, 조선공산당은 가회동 김찬의 집에서 첫 번째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95개조로 된 당칙을 심의, 통과시켰다.

1926년 4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젊은 나이에 급사했다. 선대 고종이 독살됐다고 믿었던 조선인들 사이에는 순종도 독살됐다는 소문이 돌아 민심이 어수선했다.

고종의 장례를 계기로 3.1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것처럼,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자고 제안한 것은 조선공산당 2차 집행부였다. 공산당 지도부는 민족주의 세력과 공동보조를 맞추려고 뛰어다녔다. 그러나 3.1운동을 주도했던 국내 민족주의자의 대다수는 민중봉기와 같은 유혈투쟁보다 신식교육으로 민족의 힘을 길러 미래에 대비하자는 준비론에 빠진 지 오래였다.

순종의 장례행렬이 시작된 6월 10일 오전 8시 15분, 종로 단성사 앞에서 중앙고보 3학년생 이현상을 선두로 시위가 시작됐다. 잇달아 오후 2시 반까지 장례행렬 곳곳에서 학생과 청년들이 시위를 벌였다. 도로변을 차단한 군경의 압도적인 위세 때문에 일반인의 참가는 많지 않았으나 수천 명이 시위에 나섰다. 이날 전국의 20여 개 도시에서도 동시시위가 벌어져 1천여 명이 연행됐으며 6월 내내 산발적인 시위로 총 5천여 명이 연행됐다. 곳곳에서 경찰과 무력충돌이 벌어져 160여 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6.10만세운동은 3.1만세운동에 비해 훨씬 규모가 작았지만 조선공산당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지도한 대중운동이란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만큼 조선독립만이 아니라 8시간 노동제 확립과 소작료 인하 등 계급적이고 민중적인 구호를 내세운 점도 의미가 컸다.(<박헌영 평전>, 119-120쪽)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간악한 탄압을 받을 때마다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해 맥을 이어갔으나, 스탈린이 주도한 코민테른이 해산명령을 내려 1928년에 해산했다. 그 뒤 일제하 공산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1930, 40년대에 지속적으로 분투했다. 가장 대표적 사례는 이재유가 이끌었던 경성트로이카 그룹이다.

일제 말기까지 최소 3만 명에 이르는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합하면 6만 년에 이르는 감옥살이까지 감수하고, 목숨까지 걸면서 민족독립은 물론 노동자세상 건설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웠다.

상해 임시정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3.1 만세운동 형태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터진 거대한 항일의지를 확인한 항일세력들은 임시정부를 구성하기로 뜻을 모으고 멀리 중국 땅 상해에 본부를 두기로 했다. 임시정부는 4월 11일 출범했다.

임시정부는 명목상으로 보면 한민족 최초의 민주공화국이었다.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정하고 약칭 한국이라 불렀다. 초기에는 이념적으로 약간 개방적이어서 민족주의자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다양한 정치세력을 포괄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토와 국민을 갖지 못한 유랑정부인 데다가 이후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에 반감을 드러내면서 분열되고 약해져 제한적 기능조차 잃어버렸다.

임시정부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이승만 사건이다. 임시정부는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이승만이 대한제국 시절부터 항일 입장을 표명했으며, 당시로는 드물게 미국 프린스턴대학을 다녀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이 미국 정부한테 일본 대신 한국을 지배해 달라고 청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임시정부는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셈이었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자 탄핵당한 첫 대통령이 됐다.

문재인 정부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크게 강조하면서,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 것도 검토했다. 이것은 문재인 정부가 과거 일제하 식민지 시절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계승하려고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김구의 임시정부는 “조선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인민 속에 토대도 갖지 못했던” 떠돌이 정치브로커들의 정부였다. 그렇기에 문재인 정부가 임시정부를 기억하고 계승하려 하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 정부에게 3.1운동 당시의 노동자투쟁이든 원산총파업이든 이재유의 경성트로이카 그룹이든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기억하거나 계승하고 싶지 않은 전통일 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역사의 기억은 매우 계급적이다.

항일 테러활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 윤봉길 의사가 상해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고관들을 살상한 것 등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억압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따라서 민족적 억압에 맞서 목숨 바쳐 싸우려 한 의도는 높게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다. 따라서 개인적 테러는 ‘좋은 의도’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어떤 맥락에서 그런 테러활동이 이뤄지며, 어떤 결과를 낳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평가해야 한다.

맑스주의에 따르면, 개인적 테러는 소수 영웅이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대신하는 대리주의적 행동이다. 그런 테러는 아군을 강화시키지 못하며, 적군을 약화시키지 못한다. 그런 테러는 노동자계급에게 일시적으로 전기충격을 주는 것과 같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을 교육하고, 조직하고, 투쟁의 주체로 세우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런 테러는 적장 한두 명을 제거할 수는 있지만 적 전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런 테러는 적을 약화시키지 못한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목적 달성을 위해 권총 무장만으로도 충분하다면 도대체 왜 계급투쟁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 엄청난 폭발로 고위 인사들을 위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도대체 왜 당이 필요하겠는가? 집회, 대중 선동, 선거가 왜 필요하겠는가?…

“우리가 개인 테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런 테러가 의식 고양에서 대중이 하는 역할을 하찮게 만들고 대중 스스로 무기력함에 체념하게 만들고 대중으로 하여금 언젠가 위대한 복수자나 해방자가 나타나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과 해방 직후 사회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박헌영도 이렇게 말했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공동 조계에 있는 홍구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일본 고관들을 살상하는 사건이 터졌다. … 7월에 발간된 <꼼무니스트> 제6호에서 박헌영은 ‘상해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다. 그는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개인적인 테러와 공산주의는 무관하다고 못 박았다. 개인적인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해가 되며 그들에게 비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투쟁의 환상을 심어 결과적으로 적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만다고 보았다. … 모든 투쟁은 민중의 이익을 위해 민중적으로 이뤄져야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안재성, <박헌영 평전>, 159-160쪽)

일제 강점기 폭압을 뚫고 솟구친 원산총파업

“원산은 바람도 몹시 불거니와 일기도 매우 쌀쌀한데 시가의 골목에서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파업 노동자 떼와 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순사 떼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자못 험악한 분위기 속에 빠져 언제 어디서 어떠한 일이 돌발할런지 모른다”

1929년 1월부터 시작된 원산총파업을 스케치한 당시 <동아일보> 기사다. 엄혹한 일제 강점기에도 원산 노동자들이 보여준 용기와 투지, 계급적 연대정신은 한국 노동운동 100년사에 빛나는 금자탑으로 남아 있다.

원산노동연합

원산은 인구가 불과 3만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다. 하지만 지정학적 특수성 때문에 일찌감치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1930년대에 이르면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1909년에 ‘도중’이라는 최초의 노동단체가 설립되었다.

3.1운동을 거치면서 계급적· 정치적으로 각성된 노동자들은 1921년에 원산노동자회를 결성하고 마침내 1925년 원산노련으로 발전했다. 원산노련은 노동자 급여의 일정액을 공제해서 생필품을 값싸게 공급하는 등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서도 노동자들의 자주적 단결과 자치를 싹틔우기 시작했다.

게다가 부두 노동자들의 총파업 등 끊임없는 투쟁으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이뤄냈다. 이런 과정에서 총파업 이전에 이미 원산노련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의 구심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반면 일제한테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라이징선(Rising Sun)에서 떠오른 투쟁의 태양

원산총파업의 발단은 1928년 9월 경 영국인 소유의 석유회사(Rising Sun)에서 시작됐다. 일본인 관리자가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분노한 약 120명의 문평제유 노동자들은 관리자 파면 등의 요구를 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의 기세에 놀란 회사는 3개월 후에 요구조건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하며 한 발 물러섰다. 파업은 그대로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3개월 후에도 자본가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29년 1월 14일 문평제유 노동자들이 다시 파업에 나섰고 이번에는 화물을 운송하는 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그리고 마침내 1월 22일 원산노련 전체 산하노조 총파업을 선언한다. 자동차 운전수, 취사부, 수위까지 2,200명이 일손을 멈췄다.

파업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화물의 하역과 운송, 교통이 마비되는 등 도시 전체가 멈춰 섰다. 일제 치하에서 숨죽이던 전국의 노동자들은 원산 총파업을 마치 자신의 투쟁처럼 받아 들였다. 전국 각지에서 동정금(파업연대기금)과 지지 선언이 잇달았다.

결사항전의 의지로 똘똘 뭉친 파업대오

일제 자본가 단체인 원산상의는 이번 기회에 원산노련을 궤멸시키겠다고 작심하고 즉각 엄청난 탄압을 퍼부었다. 파업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인천 등 전국 각지, 심지어 중국 안동까지 손을 뻗쳐 파업 대체인력을 모집했다. 심지어 일제의 관변단체인 국수회, 청년당을 끌어들여 ‘위력단’이라는 용역깡패 집단을 결성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 동원해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김경식 위원장 등 파업 지도부 8명을 구속했다. 마치 계엄령이라도 선포된 것처럼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파업 노동자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원산노동자들은 규찰대를 구성해서 구사대와 경찰의 폭력에 맞서 파업 대오를 지켜냈다. 파업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 잔의 술, 한 개비의 담배, 한 푼의 낭비도 반동”이라는 단호한 구호가 내걸렸다.

원산총파업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하지만 총파업이 3개월째 접어들자 위기가 찾아왔다. 위기의 진원지는 파업대오가 아니라 지도부였다. 변호사 출신으로 새롭게 파업 지도부가 된 김태영은 단호한 투쟁 대신 타협을 모색했다.

게다가 “파업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불순한 세력이 있다”라는 일제의 협박에 굴복해서 “노동운동의 통일과 노동자의 국제연대,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라는 원산노련의 강령을 폐기했다. 대신 “노동자들의 생활 향상”이라는 철저히 경제주의·조합주의적 강령이 채택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자본은 함남노동자회라는 어용노조를 설립해 파업 대오의 분열을 획책했다. 결국 파업지도부가 ‘자유로운 현장복귀’라는 사실상 투항을 결정함으로써 80여일에 걸친 원산 노동자들의 처절한 항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원산총파업은 패배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원산 노동자들이 보여준 비타협적 투쟁 정신, 단호한 파업의 규율과 투쟁의지, 연대의식은 이후 193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한국 노동자운동이 전진하는 데에서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나아가 앞으로도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향한 투쟁의 도정에서 원산총파업의 기억은 영원히 후대 노동자들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쉴 것이다. 원산총파업 만세!

원산총파업과 노동자 국제주의

흔히 민족주의자들은 원산총파업을 식민지 민족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평가한다. 물론 식민지배 아래서 원산총파업은 어느 정도 그런 특징을 띨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산총파업은 단지 조선 대 일본이라는 민족대립을 넘어 노동 대 자본이라는 계급대립의 성격을 강하게 표출했다. 당시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던 원산에서 총파업이 솟구쳐 오르자 일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원산총파업이 전국적으로 나아가 국제적으로 확산된다면 일제의 식민지배 패권전략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산총파업을 탄압했던 이유다.

그런데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서조차 이른바 민족 자본가들은 항상 기회주의적이고 타협적인 행보를 걸었다. 게다가 민족 자본가들은 일제의 노동자 탄압에 순순히 협조했다. 반면 노동자 계급은 국적에 관계없이 원산총파업을 열렬히 환영했다. 중국, 소련 등에서 파업연대기금과 지지선언이 쏟아졌다.

심지어 원산과 일본을 오가는 화물선의 일본 노동자들은 원산 총파업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일본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파업 만세”를 외쳤다. 오직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만이 제국주의적 침략과 억압책동에 가장 단호하게 맞설 수 있다는 진실을 87년 전 원산총파업은 똑똑히 보여주었다.

이재유와 경성트로이카

“1930년대 일제시대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대표적 인물 이재유. 그는 어려서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배우며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수차례의 체포를 겪은 뒤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30년대 경성을 중심으로 이현상, 이관술, 김삼룡 등과 함께 ‘트로이카 방식’의 운동을 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회주의 운동이 지식인 중심이고, 현장 기반보다도 코민테른의 승인, 지시를 중시하며 위로부터의 권위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을 때 철저하게 현장에 기반을 둔 전위조직 건설을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분투한 진정한 투사다. …

“현재 조선 노동자와 농민의 의식 수준이 매우 낮기 때문에 혁명적 의식과 실천의지가 있는 지식인들이 생산현장에 파고들어 그들의 의식을 배양한 후 전위를 조직해야 한다. 투쟁을 통해 단련된 노동자, 농민, 현장 활동에서 단련된 지식인들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나갈 때 비로소 조선의 당 조직은 진정한 혁명 조직으로 세워질 것이다.”

여기서 그가 구상한 조직운영 방식은 ‘다소 느슨하고 자유로운 체계’였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토론과 설득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이었다. 별도의 조직 대표를 두거나 먼저 조직의 형식적 체계를 완성하지 않고 지역 담당자 또는 공장, 학생 단위 등으로 책임자를 두고 이들이 동등한 입장에서 각자의 영역에서 대중을 획득하고 네트워크 방식으로 조직을 확대해나가며, 이것의 결과로 전위당을 결성하는 식으로 그는 전위조직 건설의 방향을 잡아나갔다. 조직의 명칭도 따로 정하지 않는 등 이와 같은 조직 방식을, 말 세 마리가 끄는 삼두마차라는 의미로 ‘트로이카’라 칭했다고 한다. …

이재유의 운동은, 이렇듯 현장 대중과의 결합을 중시하고 민주집중제가 살아 숨 쉬는 방식으로 조직화에 힘썼다는 점과 함께 파벌성, 종파성을 타파하고 헌신적인 투쟁 속에서 운동을 통일해 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현장에 들어간 인자들이 대중적인 연쇄파업을 조직한 뒤 구속되고 모진 고문을 받아 많은 운동가들이 전선에서 떨어져나가는 등 어려움 속에서도 이재유는 해외로 가지 않고 경성 노동운동의 지속성 유지를 위해 노력한다. …

이재유를 비롯해 당시 트로이카 운동에 함께 한 이현상, 이관술, 김삼룡, 이순금, 박진홍 등은 수차례의 체포와 고문, 옥살이를 겪으면서도, 그리고 다른 많은 동지들이 모두 압제에 못 이겨 운동을 포기할 때도 자신의 사상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이들은 출옥하자마자 흩어진 동지들을 모으고 비밀 독서모임을 조직했으며, 다른 파벌에서 운동하는 동지들을 접촉하여 끊임없이 조직화를 모색하는 등 지치지 않는 투혼을 보여준다. …

이재유와 한때 부부였던 박진홍은 여러 번 감옥을 드나들면서도 자신처럼 출옥하는 동지들을 맞아 운동을 포기하지 말고 지속할 것을 설득하는 등 ‘조직의 어머니’ 역할을 해냈다. 이 책[안재성의 <경성트로이카>]에는 박진홍을 비롯해, 이순금 등 여성 사회주의자들의 면모도 잘 드러나 있다. 보호받아야 하는 나약한 여성이 아니라 강인함과 투철한 정신으로 고문을 버티고 지하활동을 하는 이들은, 노동해방운동 속에서 남녀구분 없이 동등한 주체로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신을 보여준다. 지식인 출신이지만 노동자성을 몸에 익히고 안락함을 버리고 운동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그녀들은 운동가들이 어떻게 자기 단련을 해야 하는지도 느끼게 해 준다. …

계속된 투옥과 고문, 지병으로 이재유가 결국 젊은 나이에 옥사한 뒤에도 이관술이 중심이 되어 ‘경성꼼그룹’을 결성함으로써 그 운동의 명맥은 계속 유지되어 나갔다. ‘암흑의 시대에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 움직인 전국적 저항세력’이었던 경성꼼그룹은 1939년부터 41년 말까지 짧은 기간 활동했는데, 국내사회주의운동의 총결산이라 할만 했다. 김삼룡, 이현상은 물론이고 다른 계열 운동가들도 이 그룹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상해파, 화요파 활동가들, 함흥과 원산의 운동가들도 조직하여 ‘현장투쟁을 통해 검증된 이들로 전위조직을 구성하겠다던 이재유의 구상이 마침내 현실로 증명된 것’이었다. 이들은 조선공산당 창설 주역의 한 명이자 대표적 상징이었던 박헌영도 영입했다. 다른 세력으로부터 파벌주의라 매도되던 이재유 운동은, 비록 그는 죽었지만 그와 함께 했던 동지들이 낙오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실천함으로써 운동의 실질적 통합을 이뤄냈던 것이다. …

그들의 다수는 8·15 해방과 신탁통치 등을 겪으면서 남북한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심지어 ‘미제의 프락치’로 매도당하며 고귀한 생을 마쳤지만 그들의 투쟁의 정신은 후대에까지 귀감이 될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아무런 약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당시 식민지 치하에서 ‘미국과 영국은 자본주의 종주국이기에 앞서 파시즘으로부터 약소국을 지켜줄 동맹국’으로 보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단적인 예다. 이미 당시에 관료집단으로 고착화되었던 스탈린세력에 대한 명확한 비판적 입장도 견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젊음을 바쳐 현장투쟁을 일구고 사회주의 전위당 건설을 위해 헌신했다는 진실, 그리고 대중과 함께 하고 전위를 자임하지 않으며 실천 속에서 진정으로 검증된 전위투사들을 명확한 사상을 중심으로 결집해나갔다는 진실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고 있다.”(<경성트로이카> 서평, [노동해방] 41호)

소련과 코민테른의 퇴보가 일제하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

1923년 10월 독일혁명이 패배한 뒤, 스탈린은 1924년에 세계 노동자혁명을 사실상 포기하는 ‘일국사회주의론’을 발표한다. 1917년 10월혁명을 이끌었던 레닌과 트로츠키 등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세계혁명으로 전진하지 못하면, 러시아 노동자혁명이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수없이 얘기했다. 그런데 스탈린은 이제 “세계혁명이 없더라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일국‘사회주의’를 표방하긴 했지만, 실제론 세계혁명에 대해 부담을 느끼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 하는 소련 관료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국사회주의’ 전략(소련 관료층의 기득권 지키기 전략)에 따라 스탈린권력은 중국의 자본가계급 당인 국민당과 손을 잡고(국공합작), 국민당의 야심가 장개석 등을 ‘세계혁명의 영웅’으로 추켜세우며 그가 자기 권력을 다지고, 결국 중국 노동자혁명가들을 대량학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영국에서는 노총 관료들과 손을 잡아(영‧러 위원회) 1926년 총파업에서 노총 관료들이 총파업을 파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처럼 스탈린권력이 일국사회주의 전략을 펴면서, 세계 곳곳에서 자본가계급이나 노총 관료들과 손을 잡았기에 1919년 3월에 창립된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은 이제 세계혁명의 도구에서 스탈린권력의 외교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코민테른은 ‘무엇이 세계혁명에 이익인가’라는 관점이 아니라 ‘무엇이 소련 관료들에게 이익인가’라는 관점에서 세계 각국의 혁명운동에 개입했다. 그 과정에서 소련 관료들에게 충성할 수 있는 사람들을 각국 공산당의 지도부에 앉혔다.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유능한 혁명가들을 무수히 숙청했다.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 때는 ‘사회파시즘론’을 내세워 사회민주당은 ‘또 하나의 파시즘’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회파시즘론에 충실한다면, 히틀러 같은 파시스트에 맞서 공산당 노동자와 사민당 노동자가 노동자공동전선을 펼 수 없다. 이런 사회파시즘론은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는 걸 도왔다. 또한 코민테른 6차 대회는 ‘혁명적 노동조합’론을 제기했는데, 이것은 아무리 반동적일지라도 혁명가들은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그 노동조합에 들어가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부정하고, 소수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노동자들만으로 별도의 ‘혁명적 노동조합’을 건설하려 하는 좌익 모험주의 노조 전술이었다. 이런 노조 전술은 혁명가들을 광범위한 노동자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는 해악을 초래했다.

1935년에는 입장을 180도 선회해서 반파시즘 인민전선론을 제기했다. 이제는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노동자들의 공동전선을 넘어 민족자본가, 중소자본가들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민족자본가든 중소자본가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해서 이윤을 극대화하려 한다. 또한 이른바 민족자본가들은 이러저러한 형태로 제국주의 자본들과 유착돼 있다. 따라서 반파시즘 인민전선론은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철저히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기본 정신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소련과 코민테른의 퇴보는 일제하 노동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소련과 코민테른의 영향력은 막강했고, 소련과 코민테른의 퇴보에 대한 트로츠키의 비판은 식민지 조선의 혁명가들에게 철저히 감추어졌기 때문에, 많은 혁명가들이 소련과 코민테른의 잘못된 방침을 어쩔 수 없이 따랐다.

가령, 1930년대 노동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던 이재유의 경성트로이카 그룹도 “모든 합법활동을 개량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로 몰아붙이고, 그런 경향을 혁명진영 내부의 가장 위험한 적, 일제의 주구로 간주하면서 고립화시키는 정책을 취했다(사민주의 주요타격 방침 등). 이런 결함과 오류는 운동 기반을 스스로 축소”시켰다.(<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한길사, 205쪽)

한일 노동자연대의 상징 이소가야 스에지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사상범으로 몰아 처벌했다. 1925~1942년 사이 조선 안에서 치안유지법, 내란죄, 소요죄, 신문지법, 출판법 위반 등으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일본인은 총 18명이다. 이들은 대부분 하급 사무원, 관청의 임시직, 점원, 육체 노동자, 학생, 노동운동가 등으로 77만 명(1945년 기준)에 이르는 재조선 일본인 중 하층계급에 속했다. 이들은 반전·반제·반자본을 목표로 조선인과 연대해 항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1931년에 일제는 만주를 침략하며 15년 전쟁(1931-1945)에 돌입했다. 그러면서 1930, 40년대에 사회주의운동의 씨를 말리기 위해 엄청난 전향공작을 펼쳤다. 전향서를 쓰면 풀려나올 수 있기 때문에 판결 전에 전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끝까지 전향서를 쓰지 않고 9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감옥에 있다가 만기 출소한 일본인이 있다. 그가 바로 이소가야 스에지(1907~1998)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된 재조선 일본인 중 ‘최장’ 수감기록이다. 치안유지법의 형량이 평균 3년 내외인 것에 비하면 그는 6년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만큼 불령선인(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에게 동조한 죄가 컸다. 이후에도 항소와 상고를 거듭하면서 총 9년이 넘는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일제는 그를 두고 ‘조선의 60만 내지인 중 유일한 비국민’이라고 비난했다.

이소가야 스에지는 1907년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가게 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21세 때인 1928년 일본 육군에 입대했다. 같은 해 조선으로 건너와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한 19사단에 배치됐다. 당시 일제는 재조선 일본인의 숫자를 늘리는 정책을 썼다.

2년 후인 1930년 이소가야는 제대하고,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일질)가 세운 흥남질소비료공장에 들어갔다. 건설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공장이었다.

이소가야는 원래 과수원을 가꾸며 전원생활을 꿈꾸던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5년 할부로 과수원도 구입했다. 그랬던 이소가야가 흥남 구룡리의 손일룡 집에서 하숙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손일룡의 집은 조선 사람들이 드나드는 아지트였다. 당시 경성이 남쪽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다면, 북쪽에선 함남 함흥이 공산주의의 아성이었다. 바로 흥남공장의 조직된 노동자들이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흥남공장의 노동환경에 대해 이소가야는 <우리 청춘의 조선>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하루종일 고막이 터질 듯이 쾅쾅대는 광석분쇄기와 자욱한 분진, 용광로 속의 타고 남은 찌꺼기에서 나는 코를 찌르는 냄새 등등. 그곳에서는 유산이 주르르 떨어지는 작업복을 입고 7~8겹으로 접은 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은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가 주야 3교대로 일하고 있었다.”

이소가야는 어느 날, “이야기를 하러 오지 않겠냐”는 손일룡의 권유를 받았다. 이렇게 주인규·선규 형제, 송성관 등 후에 ‘흥남좌익그룹’이라고 명명될 혁명적 노동조합의 주도세력과 만나게 됐다. 그는 같은 일본인에게도 멸시받는 재조선 일인 최하계층이었기 때문에 조선인 노동자들과 어울리면서 동질감과 공감을 느꼈다.

이소가야는 그들에게서 식민지배의 실태, 조선이 일본 때문에 져야만 하는 가혹한 희생, 부조리하게 강요된 처참한 운명을 듣게 되고 어떻게 희망을 모색하고 이상을 추구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과거의 인생과 결별하고 투쟁에 참가할 결의를 다지게 된다. 그는 <우리 청춘의 조선>에서 이 시기 이후 자신의 삶을 “다시 태어난 삶”이라고 규정했다. 1931년 6월 결성된 흥남좌익그룹은 김원묵을 지도자로 삼고, 공장 안에 조선인부(책임 송성관), 일본인부(책임 이소가야), 자유노동자부(주선규)를 설치했다. 흥남좌익 일본인부에 속한 일본인은 마에다 긴사쿠를 비롯한 5명이었다.

이들은 기관지 <노동자신문>을 발행하고 공장 내 ‘조합반’을 조직해 이를 바탕으로 혁명적 노동조합의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흥남좌익은 1932년 5월 1일 메이데이 투쟁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발각돼, 500여 명이 검거됐다. 이것이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태로 사건)’이다. 이소가야는 투옥된 이후에도 함흥감옥에서 ‘조선혁명’에 대한 토론과 학습을 하면서 자신을 단련시켜 나갔다.

비록 흥남좌익은 1년여의 짧은 활동에 그쳤지만, 이후에도 흥남공장에선 1930년대 내내 노동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노조운동에 참여하며 성장한 노동자들은 활동경험을 토대로 해방 이후 신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소가야의 동료들도 해방 후 조선노동당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김일성 세력이 핵심권력으로 부상하면서 철저히 배제되고 숙청당했다.

한편 이소가야는 1941년까지 9년에 걸친 수감생활을 마치고 함흥형무소를 출옥했다. 그는이후 북선제강소, 함흥합동목재주식회사 장진강제재소 등에서 근무했다. 그 사이 임충석 등과 교류하면서 일제 패망에 대비했다. 해방이 되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함흥시당부 일본인부에서 활동하면서 함흥일본인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그는 이를 두고 “전후 처음으로 공산당원이 돼봤다”고 말했다. 이소가야는 소련과 협상해 일본인의 귀환을 책임졌고, 1947년 마지막 일본인 그룹이었던 엔지니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1946년부터 쓴 일기에 따르면 그는 “조선인 동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후 초등학교 소사로 일하면서 감옥생활, 종전 귀환 체험 등 조선에서의 경험을 여러 책으로 남겼다.

가령, 이소가야 스에지는 <우리 청춘의 조선>에서 1945년 8월 15일 이후 조선에 살던 평범한 일본인들이 어떻게 집단피난민이 되어 비참하게 떼죽음당했는지를 눈앞에서 목격했던 것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똑같이 움푹 패인 눈을 하고 얼굴은 검푸르게 부석부석했지만 그래도 여위어서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었다. 복도에는 열구쯤 되는 시체가 거적으로 싸여 포개져 있고 그 옆에서 남자 둘이 다른 여자 시체를 싸넣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근처에는 아직 거적으로 싸지 않은 시체가 두세 구 구르고 있었다. 그 바로 앞방에서는 창호지 같은 것도 없이 방주인들이 시체 처리하는 것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비참한 죽음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하게 밝혔다. “전쟁을 생각해내고 그것을 계책하고 실행한 것은 민중이 아니다. 항상 지배계급, 그중에서도 특히 한줌밖에 안 되는 악당들이다. 그들이 자신의 이익추구를 전쟁이라는 수단에 호소할 때 그것의 최대 희생자가 되는 것은 바로 광범한 인민인 것이고 반면 자신들은 늘 가장 안전한 장소에 있으며 전쟁을 지휘하고 국민을 선동한다.”

“일본은 36년간 조선을 과잉상품의 처리장으로, 또 지상지하의 원재료 약탈, 공짜나 다름없는 노동력 수탈의 대상으로 가장 탐욕스럽게 이용해왔다. 강도와 다를 게 없는 그 행위. 그것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체의 보수반동세력, 정치가‧독점자본‧군 수뇌부‧관료들의 추악한 도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면 이 도박의 판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것이 아닌 국민의 피이고 눈물이고 그리고 체력이었던 것이다. 명치 이후 몇 번씩이나 일본이 수행한 전쟁의 역사가 그것을 너무나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 국가라는 것은 초계급적, 초시간적, 그리고 절대적인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근대사에서 ‘일본’국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강제적으로 억압하고 자기 계급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지배권력이라는 바로 그 고전적 정의에 딱 들어맞는다.”(242-243쪽)

이처럼 조선을 침략하고, 수많은 일본 노동자민중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제를 강력하게 규탄하며, ‘일본’국가는 일본 지배계급의 도구일 뿐이라고 명료하게 주장하는 이소가야 스에지는 우리 노동자의 계급적 형제다. 이소가야 스에지는 조선을 떠나기 직전에 찾아간 조선 사회주의자 주선규를 “내 영혼에 태양을 비춰준 가장 사랑하는 친구”라고 불렀는데, 이소가야 스에지는 “만국의 노동자는 하나다”, “한일 노동자연대”라는 정신적 태양을 한국 노동자들의 영혼에 영원히 비춰줄 친구로 기억될 것이다.

일제하 노동운동의 교훈

첫째,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노동자계급은 사회의 생산을 맡고, 한 곳에 모이거나 서로 긴밀히 협력해 일한다는 점 때문에 막강한 파워를 발휘할 수 있다. 일제하 노동운동도 이 점을 보여줬다. 1919년 여름, 경성전기 노동자들의 파업은 경성 시내를 깜깜하게 만들고, 전차의 운행을 중단시키는 위력을 발휘했다. 노동자계급이 이 세상의 실질적 주인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일제하 노동자들은 일제의 총칼에 맞서 참으로 영웅적으로 싸웠다. 3.1운동 당시 해고됐는데도 앞장서서 시위와 파업을 이끈 철도노동자 차금봉, 일제의 학살에 분노해 1919년 3월 27일 일본 헌병주재소를 습격한 직산 금광노동자 100여 명,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일제의 탄압 앞에서도 총파업을 당당히 벌인 원산노동자들 등등.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라고 했는데, 일제하 노동운동의 역사는 이 점을 여러 곳에서 거듭 보여줬다.

둘째, 혁명적 지도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민족주의 세력은 대부분 일제에 금방 투항해 버렸다. 일제 식민지 시절과 8.15 해방 직후에 수많은 조선의 노동자민중이 사회주의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던 것은 민족주의 세력들이 일제에 투항할 때, 오직 사회주의자들만이 일제에 맞서 굽힘없이 싸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민족의 독립을 넘어 사회주의로 나아갈 때만 노동자민중이 겪고 있는 비참한 가난, 끔찍한 억압을 끝장낼 수 있다는 점을 계급적 직관으로 빠르게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은 대부분 스탈린주의에 크게 오염돼 있었다. 그래서 소련과 코민테른이 퇴보하는 만큼, 그로부터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맑스, 레닌의 혁명사상을 레닌 사후에도 올곧게 계승하려고 분투했던 트로츠키 등의 혁명가들은 조선 혁명가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거나 ‘미제의 간첩’처럼 철저히 왜곡된 형태로 알려졌다. 그 결과, 일제하와 8.15 해방 후 사회주의 노동운동 투사들은 스탈린주의적 왜곡 때문에 방향감각을 잃고, 좌충우돌하거나 스탈린 권력과 김일성 권력 등에게 이용당하고 숙청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런 경험은 마르크스, 레닌 등 혁명운동의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부정적 방식으로 보여줬다.

혁명이론이 없다면 노동자운동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고, 혁명적 지도부가 없다면 인류의 운명은 끔찍한 비극의 늪으로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노동자국제주의는 노동자계급의 피와 살이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는 세계혁명을 포기해 각국 혁명운동을 고립시켜 패배하게 만들었다. 이런 부정적 경험을 통해서도 노동자 국제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세계 노동자혁명의 원대한 꿈을 품고 일본인 사회주의자로서 투쟁했으며, 감옥을 탈출한 이재유를 한 달 동안이나 자기 집에 숨겨주었던 경성제대 미야케 교수, 청춘을 조선에서 보내며 전향하지 않고 조선독립과 사회주의혁명을 위해 끝까지 싸웠던 이소가야 스에지 등은 아무리 어려운 조건일지라도 노동자계급은 국적을 넘어 단결할 수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감동적 사례들이다.

오늘날 한국의 자본가들과 문재인 정부는 세계경제 위기, 한국경제 위기를 들먹이며 노동자들이 경쟁력 강화를 위해 희생할 것을 끊임없이 주문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 횡단의 꿈’ 운운하며 자본가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 곧 노동자들에게도 이익이라는 환상을 유포하려 한다.

그러나 이소가야 스에지, 미야케 교수 등의 사례는 오늘날 노동자계급이 움켜쥐어야 할 깃발은 낡을 대로 낡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노동자국제주의라는 점을 잘 알려준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힘차게 외쳤던 세계 노동자의 슬로건은 오늘날에도 우리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쉬어야 한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참고기사

* ‘일제 강점기 폭압을 뚫고 솟구친 원산총파업’, <노동자세상> 기사

* ‘흥남비료공장 일본인 노동자, 한국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한일 노동자 연대의 상징’ 이소가야 스에지의 혁명과 삶’, 오마이뉴스

참고도서

* <박헌영 평전>, 안재성, 실천문학사

* <한국노동운동사1 – 한일합방에서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안재성, 삶이 보이는 창

* <만화 한국노동운동사1 – 일제하 노동운동>, 형성사

*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 <우리 청춘의 조선>, 이소가야 스에지, 사계절

*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한국역사연구회 1930년대 연구반,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