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90년 전] 1929년 1-4월 원산총파업이 보여준 노동자계급의 단결력


“고다마를 해임하라!”

시내를 한가득 메운 문평제유공장[라이징 선(Rising Sun)] 노동자들은 저마다 주먹을 추켜올리고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고 박수를 치며 노동자들을 응원했다. 노동자들은 그런 이들을 놓치지 않고 재빠른 손으로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손으로 써서 등사한 유인물에는 고다마의 해임을 비롯한 다섯 가지의 요구사항이 쓰여 있었다.
고다마는 문평제유공장의 일본인 관리자로서 조선 노동자들에게 구타와 욕지거리를 해대기로 유명한 자였다. 120명의 노동자들은 때리면 맞으면서, 시키는 것은 무조건 해야 했던 세월을 뒤로 젖히고 1928년 9월 초에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 20일째, 제유소 사무직들의 사표 제출, 문평운송조합의 연대파업,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의 지원 등 노동자들의 투쟁이 확산되면서 당황한 회사는 노동자들과 협약을 체결한다. 파업 노동자들은 어떤 불이익 없이 현장으로 복귀했다.

원산지역 총파업

그러나 현장 복귀 후 3개월이 지나도록 회사는 협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상급단체인 원산노련은 1929년 1월 14일 문평제유, 문평운송노조의 파업을 단행했고, 자본가들이 파업파괴에 나서자 1월 22일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 총파업에 원산노련 산하 24개 노조의 노동자 2,200여 명이 참가해, 원산일대의 물류 유통을 중단시켜 버렸다. 거침없는 투쟁에 고무된 전국 각지의 노조에서 연대 기금이 쇄도했다. 중국, 러시아, 프랑스 노조에서도 응원을 보내왔으며, 특히 원산과 일본을 오가는 화물선의 일본노동자들은 원산총파업을 열렬히 환영했다.
사실 원산노련은 1921년에 설립된 이후로 8년간 20회가 넘는 파업투쟁에서 승리하며 단결력과 투쟁 실력을 탄탄하게 쌓아왔다. 1920년대가 되면서 일본 자본에 의해 본격적으로 형성 된 조선 노동자계급은 너무나도 열악한 처지에서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일했다. 이에 전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깃발 아래 뭉쳤고 파업투쟁을 거듭하며 경제적인 요구를 관철시켜온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 원산노련은 그중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의 주도 아래 꾸준한 조직 확대 사업과 교육 사업을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결합시켜 투쟁을 여러 차례 승리로 이끌어 전국적 모범으로 인정받는 곳이었다.

파업이 확장되었더라면

문평제유소 사측은 더 이상 파업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자 사용자 단체인 원산상공회의소(원산상의)에 문제 해결을 위임하고 일제를 동원했다. 일제는 문평제유소 노동자들의 투쟁을 원산부두의 전체 노동자가 받아안아 투쟁하는 모습을 봤기에 미친 듯이 노동자들을 탄압해나갔다. 파업단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지도부를 검거하며 지도부와 현장을 분리시키고, 파업단을 지지하는 집회를 금지시키고 위문을 가는 것조차 막으며 투쟁 의지가 강한 노동자들을 고립시켜나갔다.
이런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원산노련 노동자들은 한 대의 담배마저 참으며 4개월이나 싸워나갔다. 하지만 지도부의 공백 상태에서 등장한 변호사 출신의 운동가 김태영 위원장이 일제에 회유당하면서 결국 파업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일제는 원산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국으로 확대되기 전에 필사적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조선 노동자 전체와 일제의 대립으로 치달을 수 있었고, 전쟁을 지속해야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치명타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조선 노동자들은 바로 그 치명타를 입혀야만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파업 후반의 고립은 이것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원산노련은 노동자계급의 단결력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다음번 승리는 지배자들의 손에 넘기지 않을 것이다.

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