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의 운명을 좌우한 1918 독일혁명 ②


1919 년 1 월 베를린에서 혁명적인 선원과 노동자들의 시위행진.png

독일혁명의 전개과정

1918년 11월 혁명으로 독일 왕정은 무너졌다.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혁명정부’가 권력을 잡았지만, 이 정부는 혁명의 허울을 쓴 가짜였다. 1차 대전이 터지기 전까지는 전쟁 반대를 외치다가 전쟁이 터지자마자 조국 방어를 내건 사회민주당이 이 정부를 이끌었다. 신임 총리 에베르트는 취임한 지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최고사령관과 구 장교계급을 위해 군대를 계속 통제하겠다고 약속했다.

독일 전역에서 러시아 소비에트에 해당하는 노동자병사평의회가 빠르게 만들어졌지만, 노동자, 병사의 다수는 누가 진짜 혁명가이고 누가 가짜 혁명가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1919년 1월, 베를린에서 파업물결이 거세게 일었으며, 군대는 동요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혁명좌파의 영향력은 확대되고 있었다. 이런 위험을 감지하고 정부가 의도적으로 도발했는데, 일부 성급한 혁명가들이 반혁명을 단호하게 격퇴하는 수준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모험적 봉기를 일으켰다. 그 결과 봉기는 실패하고, 가장 뛰어난 혁명가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목숨을 잃었다.
1920년 3월, 우익 관료 카프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총리 에베르트는 도망쳤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맞섰다. 더 나아가 군대가 파업노동자들을 죽이든지 노동자들이 군대를 무장해제하든지 갈림길에 서 있었기에 노동자들은 무장해서 쿠데타 지지 부대를 공격하고, 몇몇 지역에서는 실제로 권력을 장악했다.

모험주의와 대기주의

1921년 3월, 독일공산당은 모험적 공세에 나섰다. 독립사민당 좌파와 통합해서 세를 50만으로 크게 확대한 공산당은 계급역관계를 면밀히 고려하지 않고 혁명적 공세, 즉 봉기에 모든 힘을 쏟기로 결정했다.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지도자 지노비에프 등도 이런 모험주의를 부추겼다. 계급 없이 투쟁에 나선 당은 거의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공산당은 그 뒤 2년여에 걸쳐 임금삭감, 실업, 노동시간 연장 등에 맞서 사민당 노동자들과 공동투쟁을 전개하며 다시 세력을 확대했다.
1923년에 독일 혁명은 결정적 국면에 이르렀다. 물가가 나날이 폭등했다. 1923년 늦여름에 독일 돈은 실제 가치가 없어졌다. 노동자들의 삶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5~7월에 경제파업이 독일 전역을 휩쓸었다. 노조 지도부는 신뢰를 잃고, 공장평의회가 실질적 지도부로 떠올랐다. 그 평의회들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노동자 6만 명이 노동자민병대 8백여 개를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급속히 좌로 나아갔고, 날마다 “(사회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공산당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여, 독일혁명은 ‘유례없이 좋은 기회’를 놓쳐 버렸다.

독일혁명 패배의 교훈

첫째, 개량정당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침략전쟁은 야만적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론이므로, 노동자혁명을 통해서만 전쟁을 영원히 끝장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개량정당은 노동자혁명을 거부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였기에, 침략전쟁에 굴종했고 노동자계급을 배신했다.
둘째, 혁명정당의 중요성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1919년 1월과 1921년 3월의 모험주의, 1923년 10월의 대기주의는 독일혁명을 패배로 이끌었다. 반면, 1917년 7월과 10월의 비슷한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노동자계급과 결합하며 때로는 침착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전진해 결국 혁명을 성공시켰다.
독일혁명의 패배는 러시아 노동자권력의 극심한 고립과 퇴보, 독일 파시즘에 길을 열어줬다. 결국 독일혁명이 세계의 운명을 좌우했는데, 독일혁명의 운명은 볼셰비키처럼 유능한 혁명정당이 있느냐가 좌우했다. 노동자계급이 이 교훈을 가슴에 새긴다면 미래는 다를 것이다.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