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19년 전, 9월] 1999년 한라중공업 점거파업 — 대량해고에 맞서 72일간 공장을 멈춰 세우다


한라중공업(현 현대삼호중공업)은 IMF 경제위기가 불어닥쳤던 1997년에 부도에 이르렀다. 그러자 회사는 97년 11월에 1차, 98년 3월에 2차 희망퇴직을 밀어붙였다. 98년 1월 22일부터 부분휴업에 이어 ‘단협해지, 임금 40% 삭감, 정리해고 500명’을 공표했다.

싸움의 전망을 잃다

그러나 당시 한라중공업노조 9대 집행부는 임금 24%를 삭감하고, 단체협약을 개악하는 등 양보교섭을 대가로 99년 12월 31일까지 정리해고를 유보한다고 합의했다. 98년 10월 출범한 10대 집행부는 투쟁을 조직하며 사측과 1999년 3월까지 체불임금을 청산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싸울 힘이 없다고 판단한 자본은 간단히 종이쪼가리의 합의문을 파기했다.
부도 전 한라중공업에는 정규직 조합원이 4,000명, 비정규직 노동자 4,000명 등 총 8,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99년 8월 18일 파업에 돌입할 당시 정규직 조합원 1,300여 명과 비정규직 노동자 400여 명이 남았을 뿐이었다.
노동자들은 회사의 공격에 분노하면서도 투쟁에 쉽게 나서지 못했다. 노조 지도부에게 투쟁 지도력이 없고, 공황과 회사 부도의 위기 상황에서 싸워서 일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전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급작스런 반전

99년 8월 11일 법정관리인 강경호는 ‘촉탁직 해지, 차장급 이상 전원 일괄사표 처리, 전체 사업부 대상 희망퇴직 실시, 생산직과 관리직 전체 인원의 50% 감원’ 계획을 발표했다.
이 소식이 현장에 퍼지자 조합원들의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했다. 그동안 회사에 충성했던 관리자들과 직반장들도 회사에 등을 돌렸다. 매일 아침 출근선전전을 하며 투쟁을 호소했던 지도부에 대한 신뢰가 커졌고, 전면파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그래서 8월 18일에 전면파업에 돌입했고, 9월 8일에 노동자들은 고용보장, 희망퇴직 및 전환배치 등 고용조정 시 노사합의, 임금과 단협의 원상회복, 체불임금 지급, 해고자 복직을 내걸고 공장을 점거했다. 1,300여 조합원의 90%인 1,200명이 점거에 들어갔다. 자본가들과 정부는 ‘30여 명에게 체포영장발부, 200억 원 이상의 손해배상 청구, 가압류, 공권력의 공장 포위, 위탁경영 철회, 회사 파산’ 등으로 위협했지만 노동자들은 당당하게 공장을 사수했다. 점거는 72일 동안이나 지속됐다.

한계와 교훈

그러나 폭력경찰의 침탈에 맞서야 할 결정적 시기가 왔을 때, 한라중공업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 전체, 사내외 하청노동자, 전국 노동자들과 단결해 맞설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정규직 노조는 99년 3월에 해고에 맞서기 위해 급하게 조직된 사내하청 노조와의 연대투쟁을 거부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가 공황에 빠지고, 회사가 파산에 직면한 상황에서는 자본가세상을 바꿀 원대한 전망과 계급적 지도부가 필요했으나 그런 준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결과, 공장 안에 고립된 노동자들은 폭력경찰의 침탈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와 급작스럽게 합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한계가 있지만 한라중공업 노동자들은 72일 동안의 완강한 공장점거파업을 통해 ‘단협 승계와 현대중공업 위탁경영 기간 동안 고용보장’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미 단협이 개악돼 형편없어졌지만, 고용보장도 제한적인 것이었고 ‘해고자 복직과 외주화 시 노조와의 사전합의’ 같은 핵심 요구도 빠졌지만, 단결해 싸운 덕에 고용을 지킬 수 있었다. 1,300의 힘으로도 파산에 직면해 포악해진 자본을 물러서게 할 수 있었는데, 더 크게 더 계급적으로 단결하고 연대해 싸울 수 있었다면 6천여 노동자가 공장을 떠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정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