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아동유괴범일까, 가족일까 — 영화평 ‘어느 가족’


어느가족2

평범하지 않은 가족

아버지는 건설 용역, 어머니는 의류 공장 비정규직으로 맞벌이를 하고 여기에 할머니 연금을 더해 세 아이를 키우는 가난한 가족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다. 영화는 주로 셋째 딸 주리의 얘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어느 겨울날, 주인공의 가족은 베란다에서 떨고 있는 다섯 살 소녀 주리를 발견한다. 아마 부모에게 맞은 것 같다. 측은한 마음에 하룻밤 재워줬다. 하지만 주리는 다시 집에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정작 그 집에서도 아이를 찾지 않았다. 그러다 주리 몸에 학대당해 생긴 흉터를 보고 이들은 주리를 키우기로 한다.
몇 달 뒤, 경찰은 주리를 찾아낸다. 부부는 심문당한다. 당신은 왜 아동을 유괴했는가? 그간의 사연을 얘기해 보아도 아이를 데려온 뒤 신고하지 않은 부부는 법 앞에 아동 유괴범이었을 뿐이다. 결국 실형을 선고받고, 주리는 원래 집으로 되돌려 보내진다. 아이에겐 당연히 원래의 부모가 필요하고, 부모에겐 당연히 친자식을 키워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주리는 자신을 낳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준 주인공 가족을 진짜 가족이라고 여긴다. 정작 친부모는 서로를 사랑하지도, 주리를 사랑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억지로 가족이라는 굴레에 묶여있었던 그들은 틈만 나면 싸우고, 욕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문 밖으로 한 발짝만 나서도 생존할 수도 없는 어린 주리는 이 모든 폭력을 그저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사람답게 살 수 없었던 이유

피로 맺어져도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피로 맺어지지 않아도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실제로도 한 부모 가족, 재혼 가족, 부모가 없는 가족, 1인 가구 등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하다.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 것인지는 개인의 당연한 자유이고 권리다. 하지만 실제로 그 권리는 현실에서 무시당하고 있다. 친부모가 아이 삶 전체를 책임져야 하게끔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친부모가 그럴 의지가 없다면 아이는 자기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 그래서 가정 폭력을 당해도 많은 아동은 도망칠 곳이 없다.
자본은 노동자를 최대한 싼값에 쓰고, 쉽게 버리고자 한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필요할 때 언제든지 공급될 수 있는 5분 출근 대기조가 필요하다. 끊임없이 육성되는 청소년, 청년은 중요한 노동력 공급원이다.
국가는 최대한 작은 비용을 투자해 노동력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래서 엄마, 아빠, 친자식으로 이루어져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정상가족’이란 관념을 만들어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불어넣는다. 아무리 ‘정상가족’에 속하지 않는 이들이 사회 곳곳에서 배제당하고 소외당해도 이슈화되어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몰리기 전까진 모르는 척한다. 어차피 노동력만 있으면 되는데 쓸데없이 대중을 위해 추가적으로 돈을 지출하는 것은 낭비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들과 그 국가는 단순히 개별 노동자를 착취하는 걸 넘어서 노동자계급과 대중 전체의 삶을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게 통제하고 있다. 오히려 모든 이의 행복을 위해 배제하고 희생시켜야 할 것은 자본가계급의 이익이다.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위해 굴러가는 사회를 바꿔야 노동자민중은 훨씬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