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정리해고에 맞선 98년 현대차 36일 파업


98년 현대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대통령에 오른 김대중은 98년 2월, 민주노총의 타협적 지도부를 노사정위에 끌어들여 유예됐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도입하는 데 합의했다. 2개월 후 현대차 자본은 1만 명을 정리해고하겠다고 발표했고, 6월 30일에는 4,830명을 정리해고하겠다며 노동부에 신고했다.

우유부단한 노조 지도부, 비타협적인 자본가들

그러나 현대차노조의 김광식 집행부는 부분파업을 반복하며 머뭇거렸다. 이 기간에 희망퇴직으로 5,500여 명이 공장을 떠났다. 7월 16일, 김광식 집행부는 임금 대신 고용을 지키겠다며 자발적인 임금삭감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현대차 자본은 타협할 생각이 없었기에 17일 정리해고 명단을 통보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쳐서 투쟁동력을 와해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정리해고 명단을 접한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관리자들의 사무실을 뒤엎었고, 명단을 통보하러 다니는 관리자들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항의가 거세지자 20일 김광식 집행부는 무기한 전면파업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현대차 자본은 휴업 조치를 내렸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해버렸다. 식당의 여성 노동자 300여 명과 가족대책위도 점거파업에 적극 가담했다. 이후 공장점거 파업은 36일 동안 계속됐다.

… 그러나 노무현의 회유를 넘지 못했다

8월 17일 공권력 투입이 임박했다는 긴장감 속에서도 2만여 조합원가족들이 모여 공권력에 맞서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쌓아 공권력 투입에 대비했다. 18일 경찰병력이 정문에 집결했다. 그러나 무장한 조합원 천여 명이 공권력에 맞서 대치했다.
공권력 투입이 어려워지자 김대중 정부는 노무현을 대표로 하는 중재단을 울산에 보냈다. 그의 중재안은 ‘정리해고 최소화’였다.
8월 21일 김광식 위원장이 중재안 수용 의사를 밝히자, 전투적 현장활동가들과 가족대책위, 식당 여성 노동자 등 1,500명이 중재안 수용을 철회하라며 집행부에 항의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전투적 선진노동자들의 지도력은 타협적 지도부를 넘어설 만큼 강하지 못했다.
8월 24일 김광식 집행부는 정리해고에 합의했다. 식당 여성노동자들이 희생양이 됐다. 이미 5차에 걸친 희망퇴직으로 8,000여 명이 나가서 현대차 자본은 실리 면에서 얻을 것을 모두 얻은 뒤였다. 그 합의는 정리해고제라는 법조문을 실제화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보다 컸다. 총회에서 합의안이 부결됐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집행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기업파산에 맞서 노동자 생존권을 지키려면

이 투쟁은 “국가와 기업이 파산에 직면한 상황에서 노동자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자본주의 이윤체제를 방어해야 고용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민주노총과 금속연맹 그리고 현대차노조 지도부들은 정리해고를 수용하면서 그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 그 이후 민주노조는 계급적 단결투쟁의 대의에서 멀어져 자신들만의 조합적 이익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조직으로 퇴행해 갔다.
그러나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대안 지도부가 싸우고자 하는 노동자들과 탄탄하게 결합돼 있지 못한 상황에서는 민주노총, 금속연맹 그리고 현대차노조 지도부의 배신적 타협을 넘어설 수 없었다. 이 투쟁의 패배는 자본주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생존권을 방어하려면 노동자들이 전 계급적 단결투쟁 전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자본주의 이윤체제를 넘어설 전망을 가진 지도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김정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