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수갑 평전을 읽고


청년노동자의 빛나는 혁명투혼을 오래 기억하자

<이수갑 평전>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책을 빠르게 구입해 단숨에 읽었다. 80대인데도 울산까지 내려오셔서 노동자들 앞에서 전평 시절의 투쟁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연하시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놀랐고 여러 번 감동했다.
약점도 있지만 이 좋은 책을 많은 노동자가 읽고, 한 평생을 혁명전사로 살아온 이수갑 선생(이하 ‘이수갑’으로 통일)의 삶과 투쟁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를 원해 서평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삼대 머슴의 아들에서 청년노동자 혁명가로

이수갑은 몸이 망가져 야멸차게 버림받은 삼대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찢어지게 가난했기에 토막집에 살았고, 신문을 배달해야 했다. 그래도 공부를 잘해 2등으로 졸업하고, 경산자동차에 취직해 수리기술까지 익혔다. 그리고 그 기술로 1945년 9월에 철도에 취직했다.
“최저임금권 확립, 8시간 노동제, 1개월간의 유급휴가제, 유해 위험작업 7시간제, 노동자를 위한 주택‧탁아소‧오락실‧도서관‧의료기관 설치” 등을 내건 전평 유인물을 10월 어느 날 보고, 전평 조직가한테 교육받은 뒤 ‘노동운동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혁명의 밑바탕’이라는 걸 깨닫고 21세의 나이에 전평과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뒤 청년노동자 혁명가로서 맹활약했다.

뛰어난 조직가, 불굴의 투사

이수갑은 혼신을 다해 조직 작업을 펼쳤다. 부산 철도 용품 사무소 270명 전원을 전평 철도노조 조합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범촌동 일대 난민촌에 공산청년동맹을 확대하고 여성들을 조직해 조선민주여성동맹에 가입시키기 위해서도 분투했다.
그리고 부산 철도국 노동자 1,700명 전체를 전평으로 조직하기 위해 당의 지도를 받으며 현장노동자들을 꼼꼼하게 관찰한 뒤 나무젓가락 개선 투쟁을 집단적으로 벌여 성공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 단결의 힘을 깨닫고 자신감도 얻어 부산 철도노조를 막강하게 조직한다. 이런 막강한 조직력 덕분에 부산 철도노조는 1946년 9월 총파업의 선봉이 될 수 있었다.
이수갑은 철도를 조직하는 동시에 대부분이 여성으로 2천 명 규모이던 삼화고무와 조선방직 노동자들을 노조와 조선공산당 내 여성동맹으로 조직하는 일도 맡았다. 신발이 닳도록 뛰면서 ‘하루를 사흘처럼 사용’했다.
1946년 8월 15일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화순 탄광노동자 학살 사건이 터지자, “광주 노동자 학살은 광주만의 일이 아니다”며 동료들과 함께 부산에서 날마다 항의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21세의 나이에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론을 토대로 한 사회주의 혁명의 꿈으로 새로 태어난’ 이수갑은 노동자계급이 이끄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한 뒤, 그 신념을 오래도록 간직했다. 수차례 붙잡혀 죽도록 고문당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뛰어난 기술력 덕분에 많은 돈을 벌면서 부유하게 살 기회들도 있었지만 가난하더라도 혁명운동에 헌신하는 길을 주저 없이 선택했다.

“내 삶은 언제나 노동운동이 중심”

이수갑은 청년 시절의 화려한 혁명경력을 먹고 살아가는 ‘과거의 혁명가’가 아니었다. “내 삶은 언제나 노동운동이 중심”이라는 자세로 50~80대에도 노동자운동에 헌신했다. 1978년부터 가톨릭노동문제상담소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해고자와 현장활동가들에게 ‘훌륭한 상담자이자 선생이 되어’ 주었고,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진상조사 활동, 철도 및 지하철 파업 지원 등 수많은 투쟁에 결합했다.
이후 철도노조 민주화운동을 지원했고, 철도노조 명예 조합원, 철도노조 고문이 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철도노동자들에게 전평 시절 철도노동자 투쟁 등을 교육했다.
2007년 1월부터는 구속노동자후원회 고문을 맡아 100명이 안 되던 구노회 회원을 500명 넘게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이수갑은 이렇게 사람들을 설득했다. “구속된 동지들을 돕는 것은 운동의 기초입니다. 우리의 선배 운동가들은 모뿔이란 후원 조직을 만들어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구속되거나 병들어 아픈 동지들을 도왔습니다. 수배된 동지들을 피신시키고, 굶주리는 그의 가족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원이 없었다면 혁명 운동은 오래 가지도 못하고 전수되지도 않았을 겁니다.”(263쪽)

계급운동의 원칙을 견결하게 사수하다

이수갑은 20대 전평 시절에 체득한 확고한 계급의식과 강고한 노동자 단결투쟁 정신을 80대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이 견지한 채 후배 노동자들에게 거듭거듭 물려주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환상과 의존, 타협적 태도가 널리 퍼져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수갑의 투철한 계급의식과 비타협적 투쟁정신을 깊이 본받아야 한다.
1997년 대선 때 전국연합과 범민련이 김대중을 지지하자 이수갑은 매섭게 비판했다. “그 사람[김대중]이 주장하는 세계화,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는 고도의 자본주의를 교묘하게 포장하고 있는 겁니다. 노동자, 민중의 제일 적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를 깨부수지 않고는 노동자계급의 전선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김대중을 지지하자는 말이 나옵니까?”
2004년 민주노총의 이수호 집행부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겠다고 밝혔을 때, 이수갑은 민주노총이 우경화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민주노총 산별 위원장이 공공연하게 자본의 앞잡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노조 핵심이 자본과 손잡고 있다니! 전평 기준으로 보자면 프락치라고 말할 것입니다.”(281쪽)라고 단호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민주노총이 점점 더 기득권화되고, 비정규직 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하다며 맹비판을 하기도 했다. “지금의 민주노총은 기본이 안 돼 있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민주노총 망합니다. 노동운동은 계급운동입니다. 지금 가장 치열하게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를 외면해서야 되겠습니까? 자기 안위만 챙기고 타협을 좋아하는 노조는 민주노조가 아닙니다. 1946년 메이데이 당시 전평 노동자들은 민중 전체의 이익을 앞세웠습니다. 정규직만을 위한 노조운동은 노동운동을 망가뜨리는 척도라는 걸 명심해야 해요.”(281-282쪽)

현장노동자들을 투쟁의 주체로 세우다

이수갑은 원칙을 철저히 지킬 줄 알았지만 원칙만 앙상하게 강조하지 않았다. 현장노동자들의 조건과 의식을 면밀히 파악하고, 현장노동자들을 투쟁의 주체로 세우는 방식으로 원칙을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알았다.
이것은 식민지 시절부터 지하에서 공산당 활동을 해온 조직전문가 선배로부터 눈물이 핑 돌도록 가혹하게 비판받기도 하고,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하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제대로 배웠기 때문이다. 이수갑이 부산 철도에서 왜 임금인상 투쟁 대신 나무젓가락 투쟁에서 출발했는지, 어떻게 노동자들이 이 투쟁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만들었는지를 다룬 대목은 매우 흥미진진하면서도 유익하다.
이런 경험을 비롯해 풍부한 노동자투쟁 경험을 쌓은 이수갑은 수십 년 뒤에 후배 철도노동자들에게 어떻게 현장활동을 전개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냉철하게 알려준다.
“제가 전평의 선배들로부터 가장 철두철미하게 배운 것은, 조합원들의 실질적인 의사를 깊이 파악하기 전에는 절대로 주관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집행부 간부들은 조합원들에게 외치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현장의 조건과 동떨어진 주관적인 계획으로는 백번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위에서 하라니까 ‘응, 그런가 보다’ 하고 겉으로는 지지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그거 안 되는데, 너희 맘대로 해 봐라’ 이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조합원들이 동의하고 희망하는 방향으로 투쟁 계획이 수립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앟으면 백 프로 실현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현장 실정에 맞는 주장이 대단히 중요합니다.”(277쪽)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따뜻한 벗

아버지가 머슴살이를 하다가 병이 나자, 어머니는 이수갑을 데리고 구걸까지 해야 했다. 이렇게 비참한 가난을 겪은 이수갑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 대해 매우 따뜻했다. 비행기 부속 공장에 끌려갔다가 나중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갈 수도 있었을 여학생이 도망갈 수 있도록 목숨 걸고 도와주기도 했다.
일본의 탄광과 공장에서 고생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왔으나, 집이 없어서 더러운 부둣가의 창고 옆이나 차가운 길바닥에서 노숙하고 있는 수많은 귀환민들을 보며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서둘러 떠나면서 비어있던 사택들을 노숙자 귀환민들에게 제공하는 마루보시 사택 투쟁을 성공적으로 조직해 냈다. 이 사택이 상당 기간 이수갑의 활동 근거지가 될 정도로, 이수갑의 도움을 받은 귀환민들은 나중에 이수갑에게 큰 도움을 준다.
이수갑은 구속노동자는 물론 해고자에게도 애정이 많아 2009년부터 전해투(전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지도위원을 맡기도 했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반말을 하지 않고 존댓말을 썼고, 여성들을 따뜻하게 배려했으며 여성노동자들이 운동에 나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이해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같은 노동자라도 여성들은 더 많은 인권 침해를 당하고 저임금에 시달립니다. 여성이 해방되어야 진정한 노동해방이 이뤄집니다. … 나는 여성들의 운동과 지도부 참여를 적극 지지합니다.”(264쪽)

무딘 시대의 날카로운 비판정신

이수갑은 이중 잣대를 인정하지 않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분명하게 비판했다. 그래서 “북한이 김일성 유일사상이라는 개인 우상화 작업을 본격화한 1970년대부터 … 김일성의 일인 독재, 전쟁을 일으킨 행위, 조선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숙청 등에 대해 냉철히 비판했다.”(195쪽)
이런 비판정신은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빛을 낸다. “요즘 철도노조를 보면 각종 회의 때 지난 번 활동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던데 … 잘 됐다, 잘못 됐다, 밤을 새워서라도 평가해야 됩니다. 일제시대 때부터 지하에서 투쟁하던 우리 전평 선배들은 평가회가 아니라 자기비판을 철두철미하게 했습니다.”(278쪽), “잘한 건 잘했다고 격려하고 잘못된 게 있으면 지적하고 비판했다. 잘못이 있으면 당사자 앞에서도 거침없었다.”(280쪽)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었던 스탈린주의

그렇다면 우리도 이수갑으로부터 배울 점은 정확히 배우되, 비판정신을 견지하며 그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극복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배우는 길이다.
이 책은 “과연 이수갑이 스탈린주의에서 얼마나 벗어난 사람인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207쪽)고 했는데, 안타깝지만 이수갑의 스탈린주의적 한계를 군데군데 확인할 수 있다.
권력을 잡은 뒤 스탈린은 그동안 레닌, 트로츠키 등 볼셰비키가 주장해온 국제혁명 노선을 포기하고 ‘일국사회주의’ 노선을 주창했다. 이것은 소련 관료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스탈린 정권은 그때그때 정권의 편의만을 위해 독일, 미국 등 제국주의 강대국들과 협력했으며, 중국, 영국, 독일, 스페인, 프랑스 등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계급을 배신했고, 민족해방투쟁에 나선 식민지 민중들도 배신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 전평 등은 스탈린정권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신탁통치를 할 수도 있다”고 한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결국 지지했고,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온 미국에 대해서도 한동안 불철저한 태도를 취했다. 이수갑이 조선공산당, 전평의 이런 스탈린주의적 한계에 대해 나중에라도 냉철하게 비판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스탈린주의는 노동자계급 국제주의가 아닌 민족주의 노선인데, 스탈린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탓인지 이수갑은 민족주의적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북한 정책과 사상을 비판하지만 교류 방식에 있어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228쪽)
“노동자 민중이 앞장서서 이루는 통일, 주인이 되는 통일이 아니라면 차라리 통일 안 되는 게 낫습니다. 지배 계급끼리 주도하는 통일은 필요 없어요.”(255쪽)라고 단호하게 말하기도 했지만, 이런 관점을 언제 어느 때나 철저하게 견지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수갑은 진정한 사회주의를 지향해 왔고, 2000년대 들어 “진정으로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을 만들자는 흐름에도 강력한 지지와 성원을 보냈”지만(285쪽), 노동자계급 혁명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일관되게 헌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굳이 그에게 정파를 묻는다면 허영구와 마찬가지로 ‘민주노총파’ 아니면 ‘민주노동당파’라고 할 정도로 정파 의식을 갖지 않았”고(285쪽), “강경 좌파들 특유의 원칙주의 때문에 강령상의 사소한 문구 같은 것을 이유로 결별하고 서로를 비난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우려와 질책을 아끼지 않았다.”(285쪽)
사회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을 위해 분투하지 않는다면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강경 좌파들’이 강령상의 사소한 문구 때문에 서로 비판하고 결별했다고 인식하는 것은 정확한 판단이 아니다. 1917년 10월 혁명을 계승‧발전시키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을 정확히 추구할 것인지, 이를 위해 노동자계급에 뿌리박은 혁명정당을 제대로 건설할 것인지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운명이 걸려 있는 ‘사활적 문제’다.
비록 혁명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분투하는 세력이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것에 가장 큰 책임이 있고, ‘국정원의 보호관찰 대상’이라 운신의 폭이 넓을 수 없었다는 점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겠지만, 이수갑이 혁명정당 건설흐름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것은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쉽게 잘 썼지만 정치적 날카로움이 부족한 저자들

이 책에서는 이수갑의 한계만이 아니라 저자들의 한계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평범한 노동자도 읽기 쉽게 잘 쓰긴 했지만, 그들의 계급적‧정치적 한계가 묻어날 때가 종종 있었다. 가령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대해 이수갑은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음에도 두 대통령의 10년은 남한 사회에 보편적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널리 보급한 의미 있는 기간이었다.”(290쪽)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온갖 패악질을 악랄하게 해댔기에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대해 낭만적으로 회고하고, 문재인 정부에 환상을 품는 중간계급 지식인들이 많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정리해고제, 비정규직 양산법을 도입하고, 철도, 가스, 전력 등 기간산업 민영화를 밀어붙여 ‘부르주아 민주주의란 결국 자본가계급만의 민주주의이고, 노동자계급을 겨냥한 자본가계급의 독재’라는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뒤를 잇고 있는 문재인 자본가정부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정부에 대한 환상은 매우 위험하므로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이수갑의 한계와 함께 저자들의 한계도 고려하면서 이 책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별, 이수갑의 혁명정신을 계승하자

이수갑은 조선공산당, 전평의 청년혁명가로 의식적 삶을 시작해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투쟁, 해방의 투혼을 한국 노동자들에게, 더 나아가 아시아 노동자들에게도 쉼 없이 전파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해온 ‘노동자계급의 별’이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 오래도록 기억하고, 비판할 건 분명히 비판하면서 그 혁명정신을 올곧게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