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노동자의 저력을 보여준 프랑스 68년 5-6월


68년5월13일총파업
68년 5월 13일 파리 시위

50년 전, 프랑스에서 거의 1,000만 명의 노동자가 총파업에 떨쳐나섰다. 이 사건은 “노동자계급은 죽었다”, “선진국 노동자들은 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다”와 같은 낡은 관념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전초전과 기폭제
68년 이전에 20여 년 동안 노동자운동이 약하긴 했지만, 68년 5-6월에 ‘폭포수’처럼 쏟아질 물줄기들이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1967년 가을에 우체국 노동자들이 파업했다. 12월에는 사회복지제도 개악에 맞선 파업이 여러 산업을 마비시켰다. 68년 1월 사비엥 트럭 공장 노동자들은 2주 동안 공장을 점거하고, 경찰과도 격렬하게 충돌했다. 로디아세타 섬유공장, 대서양 조선소, 쉬드-아비아시옹 등에서도 노동자들이 투쟁해 왔다.
하지만 68년 5-6월 투쟁의 기폭제는 학생운동이었다. 자본주의 강국들 간의 경쟁이 격해지자, 프랑스 지배계급은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를 통해 ‘프랑스 자본주의를 현대화’하려 했다. 현대 자본주의의 기술적 필요를 충족하려고, 대학생 수를 20만 명(1960년)에서 55만 명(1968년)으로 급팽창시켰다. 하지만 노동자에게 저임금, 장시간 노동, 높은 세금을 강요했듯이, 학생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교직원과 시설, 과밀학급을 강요했다.
학생들의 투쟁을 경찰이 거칠게 탄압하자, 분노가 폭발해 5월 초에 파리에서 수만 명의 학생이 참가한 강력한 거리투쟁이 펼쳐졌다. 여기에 젊은 노동자들도 상당히 합류했다. 그래서 프랑스 노총들의 지도자들은 5월 13일 하루 총파업을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파업 물결
5월 13일 파리 시위는 1944년 나찌 점령에서 파리가 해방된 이래 최대 규모였다. 수십만 노동자가 소속 노조의 깃발을 앞세우고 수만 명의 대학생, 고등학생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자본가정부나 노조 관료들 모두 이 시위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14일에는 전날의 총파업이 거둔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젊은 노동자들이 프랑스 서부 낭트에 있는 쉬드-아비아시옹 공장을 점거했다. 젊은 노동자투사들은 공장 순회선동을 통해 다른 노동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공장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2,000명 정도가 모여 밤샘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15일 르노 클레옹 공장 점거파업에 이어, 16일엔 모든 르노공장 노동자가 차례대로 점거파업에 돌입했다. 프랑스 노동자운동의 상징이었던 르노 빌랑쿠르 공장 노동자 34,000명의 공장점거는 결정적 신호였다. 철도, 파리지하철, 우체국, 전기, 병원, 은행 등 모든 산업으로 점거파업 물결이 빠르게 확산돼, 며칠 만에 1,000만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세상을 뒤흔들 잠재력
2주 동안 극도로 무기력했던 정부가 노조 지도부와 사측을 모두 불러 그르넬 협상을 통해 최저임금을 35% 인상하고, 기타 임금은 7% 올리겠다고 했다. 르노 빌랑쿠르 공장 노동자 15,000명 앞에서 노총 지도자들이 협상안을 발표하자, 노동자들은 더 많은 성과를 위해 파업 지속 의사를 보였다. 다른 공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드골 정부가 ‘내전이냐 총선거냐’며 협박하자, 스탈린주의 공산당 중심의 노총 관료들이 파업 파괴에 나섰다. 하지만 르노, 시트로앵, 푸조 같은 주요 자동차공장들은 6월 중순까지 파업을 이어갔다.
68년 5-6월 총파업은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잠재력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잠재력은 87년 7.8.9노동자대투쟁과 96-97년 총파업을 통해 한국에서도 드러났다. 르노 빌랑쿠르 공장 같은 대규모 현장들을 노동운동의 요새로 만들 수 있다면, 한국 노동자계급은 68년 5-6월보다도 더 강하게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 것이다.

국제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