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노동자계급 혁명가, 마르크스의 삶과 투쟁


파리꼬뮌
바리케이드의 꼬뮌전사들

철학 혁명
딱 200년 전인 1818년 5월 5일, 칼 마르크스가 독일 트리어 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836년에 베를린 대학에 들어가 ‘모든 것은 변한다’는 헤겔의 변증법 철학에 심취했다. 하지만 관념론자 헤겔은 신의 철학적 표현인 절대정신이 자연, 인간, 사회를 창조하고 변화시켜 왔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포이어바흐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을 뿐’이라며 유물론을 제창하자, 마르크스는 이를 즉시 받아들였고, 유물론에 변증법을 결합시켰다.

혁명적 실천과 <공산당 선언>
포이어바흐 등을 대학당국이 거부하는 것을 보고, 교수의 꿈을 포기했다. 급진적 부르주아들이 <라인신문>을 1842년 1월 창간하자, 주요 기고자로 활동하다가 편집장까지 맡아 혁명적 민주주의 기사들을 작성했다. 이때 포도재배 농민의 상황을 다루면서 사유재산권의 문제점을 느껴 경제학을 연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843년 소꿉친구이던 예니와 결혼했다. 1844년 6월, 슐레지엔 지방 직공들이 독일 최초로 노동자반란을 일으켰는데, 군대가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때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용기와 높은 수준의 조직과 의식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1844년 9월에 평생의 친구 엥겔스를 파리에서 만났다. 둘은 혁명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여러 기회주의 이론과 투쟁하면서 혁명적­ㆍ노동자계급적 사회주의 이론과 전술을 완성해 나갔다. 그 결실이 바로 1848년 2월에 발표한 <공산당선언>이다.

경제학 혁명, <자본>
1848년 유럽 혁명이 벌어졌을 때, ‘매우 훌륭한 사회주의 신문’인 <신라인신문>의 편집장으로서 활동했다. 하지만 반혁명이 승리해 독일에서 추방되자, 처음에는 파리로 갔다가 1849년 8월 런던으로 건너가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서 경제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1867년 <자본> 1권을 출간했다.
찢어지게 가난했기에 자녀 셋이 죽었다. 엥겔스가 헌신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마르크스 가족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며, 마르크스는 <자본>을 집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본>을 통해 마르크스는 노동착취에 기초해 있고, 끝없이 공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밀을 명료하게 밝혀냈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권력, 파리꼬뮌
1860년대 초반에 유럽 노동운동이 활기를 되찾았다. 파업을 깨려고 외국에서 파업파괴자들을 데려오는 자본가들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국제노동자협회(제1 인터내셔널)를 만들었다. 마르크스는 여기에 참여해 선언문과 편지를 대부분 쓰고 행정적인 일도 대부분 떠맡으면서 실질적 지도자가 됐다.
파리 노동자들은 1871년 3월에 파리꼬뮌을 건설했다. 파리꼬뮌이 잔인하게 진압당한 직후,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을 써서 꼬뮌 참가자들을 열렬히 옹호했고, 학살자들을 매섭게 비판했다. 이 일로 지배계급 사이에서 “빨갱이 박사”, “꼬뮌 괴수” 등으로 널리 알려졌다.
1881년 부인 예니가 죽자, 마르크스도 2년 뒤인 1883년에 죽었다. 이때 엥겔스는 “인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머리를 잃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시간이 갈수록 활기차게 되살아났다. 500년에 걸쳐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뻗어나간 반면, 마르크스 사상은 50년 만에 세계를 휩쓸 정도로 빠르게 뻗어나갔다.

 

김명환